- 무력한 샤 아흐마드 샤
1909년 7월 16일 이란 숭고국(카자르 제국) 술탄에 즉위한 아흐마드 샤는 이란 숭고국의 다른 샤와 달리 국내 정치문제에 관심을 두며 선제 샤가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흐마드 샤 이전의 샤인 모함마드 알리 샤는 정계에 무심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치세 동안 방치된 이란 숭고국의 민중은 대영제국 기업의 폭정으로 식량을 구매하는 것 조차 어려웠고 많은 이들이 기아로 사망했습니다.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민중이 외세 기업에 의해 굶어죽는 비참한 현실을 개탄했지만 샤는 여전히 자신의 부를 챙기며 민중을 외면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아흐마드 샤는 선제 샤보다 민중 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의욕적으로 개혁을 단행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으로 병약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이란 숭고국 제후들은 모두 부패했고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흐마드 샤는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려 이란 숭고국에서 대영제국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대영제국은 오히려 이란 숭고국에 더 깊이 개입했습니다. 1918년 대영제국은 이란 숭고국 교통로를 통제해 이란 대기근을 유발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란 숭고국 정치인들은 이에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란 민중은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비참한 생활 속에 허덕였습니다. 그 와중에 아흐마드 샤는 1919년 대영제국과 조약을 체결해 이란 숭고국을 대영제국 보호령으로 만들었습니다.
- 영웅 레자 칸
이런 이란 숭고국의 상황을 지켜보던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는 레자 칸으로 이란 숭고국의 육군장교였습니다. 레자 한은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혼란에 빠진 이란 숭고국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품었고 그의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며 이란 민족주의자, 젊은 정치인, 지식인과 교류했고 이란 숭고국을 뜯어고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레자 칸은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를 우수한 병력으로 눈여겨 보았고 러시아 내전에서 갈곳을 잃은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를 흡수해 그의 강력한 부대로 활용했습니다. 레자 칸의 군대는 이란 숭고국에서 가장 강한 군대가 되었고 그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1921년 2월 21일 레자 칸은 군대를 이끌고 테헤란تهران으로 진격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란 숭고국 정치인들은 무조건 항복했고 그는 아흐마드 샤와 기존 관료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젊고 유능한 사이드 지아 웃딘타바타바이를 총리에 임명하고 스스로 전쟁성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대영제국과 협상해 1919년 이란 숭고국-대영제국 협정을 무효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란의 영웅이 되어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정적을 제거하며 이란을 지휘했습니다.
- 레자 샤 팔라비
쿠데타로 아흐마드 샤를 해외 추방시킨 레자 칸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1923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란 숭고국의 정권을 쥔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1923년 이란은 여전히 이란 숭고국이었고 샤는 아흐마드 샤였습니다. 허나 아흐마드 샤는 해외에서 투병 생활을 했고 고국으로 귀국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레자 칸은 무스타파 케말처럼 이란 숭고국을 전복하고 이란 공화국을 건국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무스타파 케말을 존경했고 무스타파 케말이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해 개혁에 성공했듯이 이란을 공화국으로 만들어 급진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레자 칸은 무스타파 케말과 교류하며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1925년 10월 31일 레자 칸은 이란 숭고국 폐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란 공화국을 건국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수세력은 여전히 샤의 나라를 원했고 대영제국도 이를 반대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란인들은 영웅 레자 칸을 샤로 부르며 그를 추종했고 그가 샤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샤를 거부했지만 이란 의회에서 1925년 12월 12일 그를 샤로 추대했고 이란 국민은 환호했습니다. 이란인의 요구를 확인한 레자 칸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2월 15일 레자 샤 팔라비로 즉위했고 팔라비 왕조가 건국되었습니다.
- 페르시아 제국
팔라비 왕조를 연 레자 샤 팔라비는 국명을 페르시아 제국으로 교체한 후 새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무스타파 케말을 따라 국가주의로 강대한 페르시아를 부활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권위주의로 국정을 운영했고 민족주의, 군국주의, 세속주의, 반공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 경제를 국가주도 경제 시스템으로 운영해 빠른 경제성장을 꾀했습니다. 그는 정책을 빠르게 진행하며 급진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 페르시아 제국 근대화
하지만 이런 급진개혁은 이란인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란인은 자신들을 못살게 구는 대영제국을 혐오했고 그들을 따라하는 것을 거부하며 이란인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레자 샤 팔라비는 이란인에게 대영제국의 옷을 입을 것을 강요했고 법으로 명시해 처벌을 내렸습니다. 레자 샤 팔라비는 무슬림에게 이슬람을 버릴 것을 강요했고 그들의 요구를 듣지 않고 무조건 단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란인은 그에게 반발했지만 그가 이란을 되살린 것은 높게 평가해 큰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습니다. 레자 샤 팔라비는 철도를 건설하며 페르시아 제국 근대화에 속도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튀르키예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대영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1935년에는 국명을 서양식 발음인 페르시아 제국에서 자국 발음인 이란 제국으로 변경하며 자주 사상을 내비쳤습니다. 허나 대영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는 보되 항상 감시하며 페르시아 제국 국력 상승을 은밀히 견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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