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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전개

[전쟁의 서막] 보스니아에서 시작된 총성

by 롱카이. 2022. 1. 17.
  • 세력 균형: 삼국동맹

1850년 이후 유럽 전역에서 충돌의 기미가 보였습니다. 동유럽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충돌 조짐이 보였고 서유럽에서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의 충돌 조짐이 보였습니다. 유럽의 외교가들도 이 점을 잘 알아 서로 세력균형을 통해 자국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독일제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스 식민제국이 튀니지를 점령하자 식민지 확보의 길이 막혔고 이에 앙심을 품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힘을 합쳤습니다. 1882년에 맺은 이들의 동맹을 삼국동맹으로 칭합니다. 이들은 사실상 프랑스를 포위하며 중부유럽을 보호하며 양쪽 강대국과 세력균형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스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더 큰 앙금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미수복지 영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더 많이 있었고 협력한 적이 있던 프랑스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항상 이탈리아의 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독일제국은 불가리아 왕국과 오스만 제국과도 동맹관계를 맺었습니다. 불가리아 왕국은 제2차 발칸전쟁 이후 막대한 영토손실을 얻자 후원해준 러시아 제국을 배신하고 독일제국 편에 붙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수세기 동안 러시아 제국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다만 불가리아 왕국과 오스만 제국은 삼국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독일제국의 동맹으로 남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삼국동맹과 삼국협상
삼국동맹(초록색) 삼국협상(노란색)

 

  • 세력 균형: 러시아-프랑스 동맹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랑스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삼국동맹의 체결로 프랑스는 동방 국가에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대영제국은 고립주의를 선포하며 유럽 대륙 내 문제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프랑스는 대영제국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삼국동맹 동쪽의 강대국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비스마르크 제임 시절 독일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독일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고 각자 영토 확장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1872년 러시아 제국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3제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동맹으로 양국은 서로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이 만들어놓은 발칸 신생독립국들을 침범하려 하자 러시아 제국은 동맹을 파기했습니다.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바로 삼국동맹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동맹을 잃은 셈이었습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서로 필요성을 절감했고 독일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1892년 러프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독일은 프랑스나 러시아 중 한 곳과 충돌할 시 프랑스, 러시아와 양면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 세력 균형: 대영제국의 합류와 삼국협상

대영제국은 빌헬름 2세 시기 독일제국의 연이은 도발에 긴장했습니다. 대영제국은 유럽 대륙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고 대영제국 식민지 관리에 신경을 쓰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런던에서 가까운 독일제국이 계속해서 군함을 만들며 해군력을 강화해나가자 대영제국은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새로 등장한 도전자를 굴복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독일제국을 견제하던 프랑스,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본래 대영제국-프랑스 관계, 대영제국-러시아 제국 관계는 험악했습니다.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비록 대영제국이 압도적이었지만 전통적 라이벌 관계였고 1898년 남수단 파쇼다에서 벌어진 파쇼다 사건으로 양국은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갔습니다.

아프리카 파쇼다 사건
파쇼다 사건

파쇼다 사건은 영국령 남수단 파쇼다에 프랑스군이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베를린 회담으로 대영제국은 이집트에서 남아공까지 획득했습니다. 대영제국군은 이집트에서 출발해 남아공으로 진격하며 대영제국 국기를 게양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진격은 수단에서 막혔습니다. 1881년 대영제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해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스스로 마흐디(구세주 메시아의 이슬람 발음)로 자청하며 마흐디 운동을 벌였습니다. 마흐디 반란군은 독립을 외치며 대영제국을 공격했고 대영제국은 전투에서 패퇴하며 일시적으로 수단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서 마흐디 반군을 토벌했지만 이 전쟁으로 남수단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대영제국이 북수단에서 독립전쟁을 저지할 동안 프랑스 원정대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며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파쇼다 마을을 발견했고 프랑스군은 파쇼다가 프랑스 식민지인줄 알고 프랑스 깃발을 게양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이 착각해 벌어진 해프닝이었지만 대영제국에게는 도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베를린 회담으로 정해진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었고 프랑스가 대영제국의 남하를 중간에 가로막는 행위로 보였습니다.

대영제국은 파쇼다에 군대를 보냈고 프랑스는 파쇼다를 프랑스 식민지로 생각해 군대를 주둔하며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 사건은 대영제국과 프랑스에 알려졌고 국민들은 전쟁 여론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파쇼다에서 군을 철수시켜 파쇼다 사건을 해결했습니다. 덕분에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갈등을 해결하고 대화의 물꼬를 틀었습니다. 1904년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새로운 적을 막기 위해 영국-프랑스 협상을 해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영국은 이어 러시아에게도 손을 뻗었습니다.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둘은 러시아 제국이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진하는 것을 대영제국이 방해하는 Great Game을 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독일제국의 적극적 확장과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으로 독일을 두려워했습니다. 러시아는 러시아를 이미 앞선 독일제국을 두려워했고 독일제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만 제국을 염려했습니다. 때문에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오랜 앙숙관계를 청산하고 독일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1907년 영국-러시아 협상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삼국동맹처럼 세 나라가 동시에 협정을 맺은 관계가 아니라 서로 서로 협정을 맺은 관계였기 때문에 삼국협상은 삼국동맹보다 느슨한 연합이었습니다.


  • 1914년 당겨진 방아쇠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내 조피 여공작과 함께 사라예보에서 열리는 육군훈련에 참석했습니다. 황태자 부부는 사라예보에 도착 후 차량행렬을 따라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진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르비아 통일을 주장하던 비밀단체 흑수단이 보낸 6명의 암살단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소수민족에게도 높은 자치권을 주는 오스트리아 연방을 주장하며 소수민족에게 우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정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탄압받던 제국 내 소수민족(슬라브인)에게 좋은 정책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국 내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환영할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유화책을 싫어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은 민족주의를 자극해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왕국으로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스니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을 보스니아를 탄압하는 나쁜 국가로 규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가 추진하는 오스트리아 연방이 실현되면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잘 사는 보스니아가 굳이 세르비아와 힘을 합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세르비아 통일을 외치던 민족주의자들은 보스니아를 합병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대공은 제거인물이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부인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부인

사라예보에 황태자 부부의 차량이 보이자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차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수류탄은 폭발하면서 많은 군중들이 부상당했지만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고 황태자 부부를 태운 차량은 빠르게 이동해 나머지 대원들이 암살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암살을 피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행사를 마치고 사라예보 병원에서 테러 부상자들을 위로했습니다. 그 후 돌아오는 길에 차량이 우연히 6단원 중 한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있는 노점에 다다랐습니다. 프린치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총을 꺼내 페르디난트와 조피 부부를 쏴 암살했습니다. 본디 프린치프는 페르디난트 대공과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장군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쏜 총알에 조피 부인이 맞고 포티오레크 장군은 우연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해 제국을 도발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황태자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제국의 민중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르비아의 도발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는 듯 싶었습니다.


  •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반응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보스니아는 이 사건에 충격을 먹었습니다. 보스니아 내 오스트리아 정부는 반세르비아 운동을 부추겼고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이에 반응해 반세르비아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보스니아에 살던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또다른 국가 세르비아의 지배에 놓이는 상황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보스니아에 살던 또 다른 민족 세르비아인을 폭행하고 살해하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반세르비아 폭동은 보스니아 전국으로 퍼져 대대적인 세르비아 증오범죄로 이어졌습니다. 보스니아 무슬림은 오스트리아의 묵인 하에 슈츠크롭스 민병대를 결성해 세르비아인 인종청소를 자행했습니다. 보스니아의 오스트리아 정부는 시민의 행동에 동참해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고 억압했습니다.

한편 세르비아 내에서는 암살단의 행보에 대한 환호와 칭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세르비아 지배층까지 나서 암살을 찬양하고 흑수단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곧 있을 총선을 앞두고 세르비아 차기 후보들은 오스트리아를 자극하는 언행을 적극적으로 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고무시켰습니다.


  • 7월 위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세르비아 영토를 합병하면 오히려 제국 내 세르비아인 독립운동을 필두로 민족독립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 제국이 해체될 수도 있다는 예측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르비아가 도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온적 대응을 보이며 한달 뒤에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최후통첩항을 작성하는 동안 세르비아와 전쟁 후에도 제국의 해체를 막을 방법을 논했습니다. 회의 끝에 제국은 세르비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도 세르비아의 영토와 주권을 보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러시아 제국이 참전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결정이었습니다. 이 내용이 세계에 알려지면 러시아 제국의 참전을 막을 수 있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국의 약점을 잡히기 싫어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은 최후통첩문을 작성한 뒤 주변국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우방 독일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백지수표를 주었습니다. 세르비아의 우방 러시아 제국은 사라예보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프랑스와 대영제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이들도 세르비아를 비난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정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주변국의 반응을 확인하고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에게 최후 통첩을 전했습니다.


최후통첩
1. 모든 반(反) 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2. 암살에 관련된 모든 범인을 처벌할 것
3. 반 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4. 위 조항에 관련된 당사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에서 활동할 것을 허용할 것
만일 세르비아가 48시간 내로 조건을 모두 수용하지 않을 경우 선전포고하겠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조건을 수용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4번 조항을 일부러 도발적인 문구로 만들어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은 당연히 4번 조항에 분노하며 4번 조항을 수용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에 세르비아 왕국은 전국 동원령을 내리며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선전포고 직전 러시아 제국에게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최후통첩문을 한달을 허비하며 만드는 동안 러시아 제국의 관료들은 세르비아를 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공격해 발칸반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더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독일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폭 지지하며 백지수표를 주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1914년 7월 28일 11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수도 베오그라드로 오스트리아군이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바 강의 철교를 폭파했습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국지전으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일이 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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