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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전구

[아프리카 전구: 반연합국 봉기와 식민지 쟁탈전] 제국주의가 뒤흔든 아프리카

by 롱카이. 2022. 4. 18.
  • 베를린 회담이 그은 경계선

베를린 회담 아프리카 분할 만평
베를린 회담 만평

아프리카 해안지역에서 자원무역과 노예무역으로 식민지 사업을 하던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원을 탐냈고 탐험가와 군사를 보내 아프리카 영토를 다른 국가들이 점령하기 전에 먼저 점령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아프리카 내륙에서 유럽 군사끼리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이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제국 재상은 유럽 국가들을 베를린Berlin으로 초청해 각 국이 점령한 지역을 정하며 아프리카에 국경선을 그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지리에 대해 어느정도 알았을 뿐 민족 경계선 등에 무지했고 남들이 차지하기 전에 먼저 차지하기 위해 잠령지에 무작위로 국경선을 그어버렸습니다. 이것이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이어진 베를린 회담으로 유럽 국가들은 베를린 회담으로 아프리카에 대규모 식민지를 확보했습니다.

아프리카 베두인
아프리카 베두인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의 국경선을 확정한 후 병력을 보내 아직 점령하지 않은 곳을 점령해갔고 아프리카 내륙에 인프라를 설치하기 위해 현지인을 징발해 철도를 건설하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어 아프리카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총독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어 아프리카 현지인들을 지배국가에 충성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현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부는 유럽 국가들의 세뇌교육에 반발했습니다. 이 현상은 오래 전부터 고유 문명을 이룩하고 다른 대륙과 교류하던 북아프리카에서 더 선명하게 일어났습니다.




  • 오스만 제국과 북아프리카

세누시
세누시

1400년대에 전세계에 위용을 떨치던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로 제국의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의 종주국이자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국가로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해안지역을 지배했고 일시적으로 소말리아를 지배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특히 북아프리카 이슬람의 중심지인 이집트를 지배해 이집트를 통해 북아프리카에 높은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비단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외에도 오래 전부터 이슬람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1884년 이후 침공한 유럽 기독교인들의 동화정책에 반발했습니다. 때문에 1914년 11월 6일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세력에 대한 성전을 선언하자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들은 이슬람 칼리파국 오스만 제국의 선언에 응했고 기독교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칼을 뽑았습니다. 이는 유럽 제국주의에 반발하는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은 이슬람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 독일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독일제국과 독일제국령 아프리카 식민지
검은색: 독일제국과 독일제국령 아프리카

독일제국은 이미 아프리카 해안가에 식민지를 확보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벨기에 왕국과 달리 독일통일을 늦게 하느라 아프리카 해안에 별다른 식민지를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프리카 해안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노예무역과 자원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이들이 아프리카에서 벌어들인 자금은 바로 국가 경제력이 되었습니다. 독일제국의 민중들은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처럼 식민지 사업으로 국부를 쌓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민중의 여론에 따라 아프리카에 독일제국 식민지를 확보했습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식민지의 치안을 담당할 규모의 독일군 병력들을 식민지로 보냈고 독일군의 활약으로 독일제국은 짧은 시간에 4개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제국의 식민지는 독일령 서아프리카(독일령 토고란트, 독일령 카메룬),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동아프리카였습니다.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 재임 시절 동아프리카에 독일령 위투와 독일령 소말리란드를 건설했지만 이후 대영제국에게 식민지를 팔았습니다.


  • 서부전선의 후방 아프리카

프랑스군과 프랑스 식민지군
프랑스군 1-2: 프랑스 본토인, 3: 인도차이나군, 4-5-6: 아프리카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연합국은 유럽 장정들로 전쟁을 벌이려고 했지만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벨기에 왕국 중부를 점령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의 샤를 에마뉘엘 마리 망쟁 참모장은 독일군의 프랑스 제3공화국 침공을 우려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저출산으로 청년층 인구감소에 시달렸고 프랑스군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반대로 인구 폭증으로 전쟁 장병이 많은 독일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샤를 에마뉘엘 마리 망쟁 참모장은 부족한 프랑스군 병력을 아프리카 식민지의 장정으로 보충하자고 주장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 공화정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프랑스 식민지에서 병력을 차출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병력을 징집했고 동남아시아에서 요역 인원을 징발했습니다.

남아프리카 연방군
남아프리카 연방군

그리고 대영제국은 서부전선으로 파병할 영국원정군을 구성하기 위해 영국령 인도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제국, 뉴질랜드 자치령, 남아프리카 연방의 병사들을 모아 영국령 이집트 술탄국 등 아프리카에 임시 배치한 후 영국원정군을 양성했습니다. 그 후 병사들을 선박에 실어 수에즈 운하 혹은 희망봉을 돌아 서부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연합국은 아프리카를 통해 병력을 끊임없이 충원했고 독일제국은 서부전선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연합군에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은 독일군이 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을 공격해 병력 지원 차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프리카의 독일군을 선제공격했습니다. 이렇게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포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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