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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만주사변] 통제불능의 군부

by 롱카이. 2022. 12. 13.
  • 국민당의 북벌
국민당(하늘색)의 북벌
국민당(하늘색)의 북벌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중화민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나갔습니다. 일본제국은 중화민국의 핵심 세력인 북양정부와 거래를 지속하며 북양정부를 일본제국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중화민국 남양정부의 쑨원은 이 상태로면 중화민국이 일본제국에 흡수될 것을 우려했고 북양정부에 대항해 북벌을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각지 세력이 좀처럼 단합하지 못하고 계획이 진전이 되지 않다 1925년 쑨원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쑨원의 뒤를 이은 자는 장제스였습니다. 장제스는 쑨원이 시도했던 국공합작을 이어갔지만 공산당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졌고 이에 국민당 우파들은 공산당을 경계하며 비난했습니다. 결국 공산당도 국민당을 비난하며 국공합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양정부를 모은 국민당은 전쟁 준비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허나 1926년 직봉풍전쟁으로 북양정부가 수많은 군벌들의 내전에 빠졌고 장제스는 이를 기회라 여겨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이후 북벌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 상계군벌이었던 탕성즈도 국민당에 합심했습니다. 국민당 북벌군의 북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위기를 느낀 북양정부 군벌들은 단합했지만 북벌군의 공격에 대거 몰락하고 북양정부에 장쭤린의 봉천군벌만 남았습니다. 장제스는 1926년 1차 북벌 이후 1928년 2차 북벌을 감행해 장쭤린의 봉천군벌을 맹공했습니다. 북벌군은 봉천군벌을 격파하며 베이징北京에 입성했고 일본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장쭤린은 일본제국으로 도망쳤습니다.

장제스의 북벌
장제스의 북벌

그러나 일본제국 관동군은 정부의 지침없이 독자적으로 선양瀋陽행 철도에 폭탄을 설치한 후 장쭤린의 기차가 다가오자 폭파하는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의 뒤를 이어 봉천군벌을 지도한 장쉐량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장쭤린은 국민당에 합류했습니다. 장쉐량이 국민당에 속하면서 만주가 국민당 손에 떨어졌습니다. 이로서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의 독재로 중화민국이 분열된 이후 처음으로 중화민국의 핵심지역을 통일했습니다. 장제스는 중화민국 통일 이후 일본제국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일본제국과 북양정부가 맺은 조약을 모두 파기했습니다. 국민당의 이 행보는 중화민국을 잠식하려는 일본제국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 관동군은 국민당이 만주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만주를 선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류탸오후 사건
남만주철도(붉은선)
남만주철도(붉은선)

황고둔 사건으로 전세계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 내각도 관동군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제국 내각의 육군대신들은 관동군을 옹호하며 관동군을 두둔했습니다. 이에 관동군은 일본제국 본국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했습니다. 관동군은 만주침공을 주장했고 일본제국 참모본부도 반대했지만 관동군은 참모본부의 명령도 어겼습니다. 관동군은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 사건을 일으켜 봉천군벌의 잘못으로 씌우고 만주침공의 명분을 쌓았습니다. 관동군이 만주 침공을 공공연하게 외치자 화베이華北과 만저우滿州를 차지한 장쉐량은 관동군의 요구에 따라 만저우滿州를 무장해체시키고 본인이 화베이華北으로 이동했습니다. 장쉐량은 관동군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들어 침공명분을 없애려고 했고 일본제국 내각과 참모본부는 명분이 사라져 관동군에게 침공준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제국의 히로히토 천황도 등장해 관동군에게 만주침공중단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전쟁만을 외친 관동군은 그들의 명령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관동군은 일본제국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건립한 남만주철도를 폭파한 후 그 사건의 배후를 봉천군벌로 지목하기로 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류타오후柳條의 남만주철도에 폭탄을 설치한 후 폭파시키고 폭발사건 이후 봉천군벌을 비난하며 바로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관동군은 선양시瀋陽市 베이다잉北大營의 동북군을 공격했습니다. 이어 조선에 주둔하던 관동군도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고 관동군은 선양瀋陽을 완전점령했습니다. 관동군이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만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제국 정부는 황당하게도 그들의 행위를 애국행위라 칭찬하며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일부 내각 정치인들이 관동군의 무단행위를 비판했지만 육군대신을 비롯한 군부는 이 기회에 발언권을 높였고 내각에 동조할 것을 압박했습니다.


  • 만주사변
만주를 공격하는 관동군
만주를 공격하는 관동군

관동군이 류탸오후 사건을 일으키고 선양瀋陽을 침공할 때 국민당 내부는 혼란에 빠졋습니다. 국민당은 잔존한 군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소련과도 전쟁을 벌였습니다. 장제스는 더 큰 위기인 내전을 지휘하느라 신경쓰지 못했고 만주문제는 봉천군벌 장쉐량의 재량에 맡겨졌습니다. 허나 장쉐량은 아편중독 상태였고 일본제국 관동군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관동군이 만주 전체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관동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쉐량은 봉천군벌 주력 병력을 화베이華北에 주둔시키고 관동군과 협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관동군은 남만주철도를 따라 이동하며 북진했습니다.

일본제국과 만주국
일본제국과 만주국

이에 장쉐량은 급히 동북군에게 관동군을 막으라고 명령했고 마잔산이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관동군을 역공했습니다. 허나 마잔산의 동북군과 관동군의 병력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졌고 관동군은 재공격으로 마잔산의 동북군을 섬멸했습니다. 장쉐량은 뒤늦게 화베이華北에 주둔한 주력병력을 이끌고 만주로 진격하려고 했고 관동군도 봉천군벌과의 전쟁을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장쉐량이 봉천군벌을 이끌고 만주로 진격을 시작하자 옌시산의 염계군벌이 봉천군벌을 공격했습니다. 봉천군벌은 염계군벌의 기습공격에 화베이華北으로 복귀해 염계군벌과 전쟁을 벌였고 관동군은 1932년 하얼빈哈爾濱까지 점령하면서 만주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 상하이 사변과 만주국 건립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제국 해군 육전대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제국 해군 육전대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장제스는 관동군에 분노했습니다. 장제스는 국민당을 모아 관동군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관동군에 맞써 싸울 것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국제연맹에 호소해 관동군에게 압박을 보냈습니다. 관동군은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최후의 황제 푸이를 만주국 군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국민당과 세계여론은 이를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또한 만주 내에서도 일부 동북군들이 게릴라전으로 관동군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관동군은 만주의 동북군을 제거하고 국제사회의 이목을 만주에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 또다른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관동군과 일본 군부는 회의 결과 중화민국의 최대 도시인 상하이上海를 공격해 전세계와 국민당의 이목을 상하이上海로 집중시키기로 했습니다. 관동군은 중국인의 사주로 1932년 1월 18일 상하이上海에 있는 일본인 승려를 폭행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승려의 사망원인을 중국인으로 돌려 그들을 비난하고 상하이上海 일본인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일본인과 중화민국 헌병 사이에 소요사태가 발생했고 일본제국은 해외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제국 해군 육전대를 상하이上海에 파병했습니다. 이에 국제사회는 일본제국을 비난했지만 일본제국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상하이上海 점령을 명령했습니다. 이윽고 육전대와 중국군 사이의 상하이上海 시가전이 발발했고 1달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상하이 사변 동안 관동군은 만주의 동북군을 수색섬멸했고 1932년 3월 3일 일본제국과 중화민국 사이에 상하이 사변 휴전협정이 이루어졌고 그 사이 모든 준비를 마친 관동군은 1932년 9월 15일 만주국을 건립되었습니다.


  • 일본제국 군부의 폭주
5.15사건 신문기사
5.15사건 신문기사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해군력이 강제된 일본제국 군부는 일본제국 내각을 불신했고 점차 내각의 명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 처분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일본제국 내각과 천황은 관동군을 비판했지만 군부는 관동군을 칭찬했습니다. 일본제국 군부는 내각과 총리에 대해 불만을 틈만 나면 표출했고 사관학교의 젊은 장교들도 일본제국 군부의 불만에 경도되어 덩달아 내각을 증오했습니다. 이는 특히 일본제국 해군에서 극심했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반대한 함대파를 중심으로 한 일본제국 해군의 젊은 장교들은 총리 암살계획을 세웠습니다. 1932년 5월 15일 일본제국 함대파의 해군 위관급 장교들은 수상관저를 침입한 후 총으로 관저 안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수상은 총상으로 사망했고 장교들은 수상관저를 나와 경시청, 은행 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일본제국 헌병에 자수했습니다. 일본제국 정부는 5.15사건을 단순 테러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했습니다.

2.26사건
2.26사건

이어 일본제국 육군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제국 육군은 황도파와 만주파, 통제파로 나뉘었는데 1931년 황도파가 일본제국 육군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통제파의 견제로 숙청되었습니다. 그래서 황도파는 통제파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1936년 2월 26일 일본제국 육군 황도파의 젊은 장교들이 총리를 암살하고 도쿄東京의 주요정부시설을 점령했습니다. 쇼와 덴노는 일본군에게 진압을 명했고 일본제국 해군과 헌병대가 황도파 반란군을 진압했습니다. 이로서 황도파는 숙청되었고 통제파가 일본제국 육군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통제파 출신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은 2.26사건을 진압한 이후 일본제국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도조 히데키의 총리 집권과 함께 일본제국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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