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하심 가문] 끝나지 않은 중동 이야기

by 롱카이. 2022. 12. 2.
  • 샤리프 해결안
샤리프 해결안
샤리프 해결안

아라비아 통일을 원했던 후세인 빈 알리와 달리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국경을 정했습니다. 이에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샤리프 해결안을 제시해 헤자즈 왕국, 시리아 아랍 왕국, 메소포타미아 왕국 세 왕국을 건설한 후 세 왕국을 각각 후세인 빈 알리의 세 아들에게 나눠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헤자즈 왕국은 장남인 알리 빈 알후세인에게, 시리아 아랍 왕국은 파이샬 1세 빈 알후세인에게, 메소포타미아 왕국은 압둘라 1세 빈 알후세인에게 할양하면 아랍 전통을 따르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일단 그들에게 세 왕국을 나눠줬습니다.


  • 결국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파리 강화회담 이후 중동 영토
파리 강화회담 이후 중동 영토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정한 국경으로 중동을 분할하려고 했지만 하심 가문의 반발이 극심했고 미합중국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파리 강화회담에서 샤리프 해결안에서 제시한 영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아랍왕국과 메소포타미아 왕국을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라 식민지와 자치국 사이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했습니다. 물론 헤자즈 왕국은 완전 주권국으로 인정하며 아랍 봉기의 공로를 인정했습니다. 허나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곧바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꺼냈습니다.


  •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1920년 초 중동
1920년 초 중동 지도

시리아 아랍 왕국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파리 강화회담 결과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완전 아랍 국가 건설까지는 아니어도 시리아 아랍 왕국이 완전 주권국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19년 6월 3일 "독립 혹은 죽음"을 외치며 반프랑스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7월 2일에는 시리아 아랍 왕국 의회에서 완전 독립을 통과한 후 프랑스 제3공화국에게 시리아 아랍 왕국 완전 독립을 통보했습니다. 시리아-레바논을 위임통치령으로 둔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 아랍 왕국 독립을 불허했고 프랑스군을 파견해 무력 진압했습니다. 마침 프랑스 제3공화국은 튀르키예 분할을 위해 프랑스군을 파견해야 했으므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시리아 해안지대를 점령하며 튀르키예 남부로 진격했습니다.

1920년 선포된 시리아 아랍 왕국(초록색)
1920년 선포된 시리아 아랍 왕국(초록색)

시리아 아랍 왕국은 해안지대를 모두 잃었고 1920년 3월 8일 시리아 아랍 왕국을 최종 선언했습니다. 파이샬 1세 빈 알후세인은 현실을 잘 알아 여기서 멈추려고 했지만 참모총장 유수프 알 아즈마 등 아랍 급진 민족주의자들은 국왕의 진언을 무시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른 위임통치령 영토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1920년 3월 8일 바로 시리아 아랍 왕국 내부로 진격했습니다.


  • 산레모 회담
산레모 회담
산레모 회담

프랑스-시리아 전쟁이 한창인 1920년 4월 25일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의 산레모San Remo에서 산레모 회담을 열었습니다. 산레모 회담의 안건은 프랑스 제3공화국, 대영제국의 중동 위임통치령 문제였습니다. 특히 시리아 아랍 왕국 의회에서 독자적으로 범시리아주의를 외치며 독립을 외쳤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이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제국은 산레모 회담으로 위임통치령 영토를 확정하는 등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수정해 위임통치령을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회담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위임통치령 영토를 지정했습니다.

산레모 회담으로 정한 영토
산레모 회담으로 정한 영토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산레모 회담으로 영토를 확정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 아랍 왕국을 완전 정복한 후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영토를 확정했고 대영제국 역시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와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트란스요르단,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영토를 확정했습니다.


  • 산레모 회담에 대한 저항
1920년 이라크 봉기
1920년 이라크 봉기

대영제국은 산레모 회담 직후 위임통치령 영토를 획득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은 7월 25일 시리아 아랍 왕국을 전복한 후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영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위임통치령에 본국 법률을 적용했습니다. 이는 아랍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1920년 5월 대영제국 정부가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이라크에 대영제국에 납부할 세금을 요구하자 이라크 시아파 아랍인들은 대영제국이 자신들을 대영제국 법률로 통치하려는 것에 반발해 이라크 봉기를 일으키며 항의했습니다.

쿠르디스탄
쿠르디스탄

그리고 동시기에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이라크 북부에서는 쿠르드족이 독립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마흐무드 바르잔지 셰이크 등 수많은 쿠르드 독립운동가들이 반영 쿠르드 독립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쿠르드 독립군의 위세는 대단했고 대영제국 정부는 카자르 제국에 있는 대영제국 부대를 투입해 쿠르드 독립군을 진압했습니다. 영국군은 항공기를 동원했고 쿠르드족에게 최루탄을 발포하며 그들의 독립운동을 강경진압했습니다. 영국군은 쿠르드 독립군과 시아파 아랍인 봉기를 무장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대영제국 정부는 예상보다 더 큰 저항에 놀랐고 그들을 진압하느라 많은 예산을 소모해야 했습니다.


  • 1921년 카이로 회담
1921년 카이로 회담
1921년 카이로 회담

대영제국은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문제를 걱정했습니다. 아서 벨푸어에 의해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했지만 현지인들은 이를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거기에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도 1920년 이라크 봉기를 일으켜 강한 반영 정신을 보였습니다. 당황한 대영제국은 엎질러진 중동 문제를 수습하려고 1921년 3월 12일 카이로 회담을 열어 중동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1921년 카이로 회담 영토
1921년 카이로 회담 영토

대영제국은 압둘라 1세 빈 알후세인에게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의 에미르 자리를 제공했고 시리아에서 쫒겨난 파이샬 1세 빈 알후세인에게 이라크 하심 왕국 국왕 자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대표와 유대인 대표를 만나가며 타협점을 찾을 것을 시도했지만 윈스턴 처칠 등 많은 대영제국 대표들은 대영제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땅으로 지정하자는데 동의했고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홀대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만 알사우드는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지배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 위임통치령은 팔레스타인만 남고 트란스요르단 토후국과 이라크 하심 왕국이 새로 등장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대영제국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 헤자즈 왕국 멸망
1920년 중동 지도
1920년 중동 지도

한편 하심 가문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심 가문은 강대국에게 배신당하고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침공에 시달렸습니다.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헤자즈 왕국을 수시로 침공했고 1925년 결국 헤자즈 왕국을 멸망시켰습니다. 헤자즈 왕국의 국왕 알리 빈 알후세인과 은퇴한 후세인 빈 알리는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으로 도망갔습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숙적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만 알사우드에 대한 복수를 외쳤지만 이미 고령이었고 평화를 사랑했던 압둘라 빈 알후세인의 제지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후세인 빈 알리는 아들을 몰아내고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의 에미르가 되려고 했지만 들통났고 키프로스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