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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크리스테로 전쟁] 혁명정부와 가톨릭 교회의 대결

by 롱카이. 2022. 12. 5.
  • 멕시코 혁명이 끝나고 나서

멕시코 혁명군
멕시코 혁명군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을 힘없는 민중에게 재분배하기 위해 발발한 멕시코 혁명은 1910년대를 휩쓸었습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총을 든 자들은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멕시코 혁명 동안 멕시코 합중국 대통령이 된 자들은 토지개혁과 가톨릭 개혁 등 부의 재분배를 시도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멕시코 합중국에서 막대한 권력을 가진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혁명 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혁명 대척점에 섰습니다. 때문에 멕시코 혁명 당시 토지개혁이 진행되며 공화군과 가톨릭 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었습니다.

 

 

 

  • 1917년 멕시코 헌법

과달라하라 교회
과달라하라 교회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기 전 멕시코 합중국 토지의 3/4는 로마 가톨릭의 소유지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막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하며 멕시코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착취했습니다. 동시에 멕시코 합중국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멕시코 합중국 정부가 그들을 두둔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멕시코 합중국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예전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계 분리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멕시코 혁명 동안 혁명군은 가톨릭의 정계 분리를 시도했습니다.

 

1917년 멕시코 혁명정부
1917년 멕시코 혁명정부

1917년 2월이 되자 멕시코 혁명은 혁명군의 승리로 정리되었습니다. 혁명군은 멕시코시티Ciudad de México 입성에 성공했고 혁명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혁명정부의 일원이었던 사회학자 프란시스코 무히카는 멕시코 혁명 동안 멕시코 로마 가톨릭의 횡포와 농민이 받는 고통을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했고 1917년 2월 5일 멕시코 혁명정부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멕시코 헌법을 통과했습니다. 1917년 멕시코 합중국 헌법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계와 교육 분야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종교 선택의 자유를 명문화하고 마지막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야 했습니다. 이에 멕시코 합중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17년 2월 24일 헌법 저항 성명서를 제출하며 반발했습니다. 혁명정부는 멕시코 합중국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이참에 완전히 제압하려고 했고 혁명정부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 갈등은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iga Nacional Defensora de la Libertad Religiosa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대통령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대통령

1924년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멕시코 혁명정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본격적으로 탄압했습니다. 혁명군 출신이었던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대통령은 멕시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근절해야 할 사회악으로 바라보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멕시코의 매국노로 규탄했습니다.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

이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반발하며 1925년 3월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iga Nacional Defensora de la Libertad Religiosa을 결성했습니다. 멕시코시티Ciudad de México에서 출범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당해 멕시코 합중국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미합중국의 기사수도회인 콜럼버스 기사단도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에 가담했습니다.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세를 확장하며 혁명정부에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불매운동, 파업 등의 활동으로 정부에게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이에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대통령은 1926년 카예스 법을 발효하며 정부 허가 하에만 사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하며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 크리스테로 전쟁

크리스테로 전쟁
크리스테로 전쟁

혁명정부가 강하게 나가자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무장투쟁을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어 이들은 농민을 선동하며 무력을 키웠습니다. 마침 혁명정부는 무능으로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기에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혁명정부 전복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1927년 1월 연초에 그들은 무장봉기를 시작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군
로마 가톨릭 교회군

하지만 멕시코 농민들은 무능한 혁명정부보다 기득권이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더 싫어했고 교회에 비협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봉기 전 모은 세력들로만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현실감각보다는 주에 대한 신실함으로 무장한 세력으로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테로 전쟁은 반란군이 무조건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미겔 프로 처형
미겔 프로 처형

멕시코 혁명정부군은 반란군을 빠르게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잔존 반란군은 거처를 옮기며 반란을 지속했고 그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멕시코 합중국 곳곳에서 반란군이 산발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혁명정부군은 그들을 즉각 처형했습니다. 이 때 반란군은 예수 그리스도 만세를 외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1927년 반란 초반 호세 라몬 미겔 아구스틴 프로 후아레즈 등 핵심 인물이 처형된 후에도 2년 간 크리스테로 전쟁이 지속되었고 1929년 6월 에밀레스 포르테스 힐 대통령과 교회는 타협점을 찾아 크리스테로 전쟁을 종결했습니다.

 

 

 

  • 성전으로 기록되다

크리스테로 전쟁 사진
크리스테로 전쟁 사진

크리스테로 전쟁은 전쟁이 진행되며 성전으로 추양받았습니다.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혁명정부를 비난하며 미합중국으로 이주했고 멕시코 합중국에 남은 가톨릭 신자들도 혁명정부를 비판했습니다. 멕시코 합중국을 압제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는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오히려 동정받았고 혁명정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근절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때문에 멕시코 합중국이 품은 로마 가톨릭 교회 문제는 이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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