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
대영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세계에서 출몰하는 동맹국 군대를 방어하기에는 영국원정군 병력이 모자르자 식민지에서 병력을 충당했습니다. 그 중 인도제국은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아시아, 아프리카와 문화적 교류가 활발한 곳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전선에 투입하기에 좋은 병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 정부는 인도제국에서 인도원정군을 결성해 중동전선, 아프리카 전선, 일부는 서부전선으로 파병했고 그 대가로 인도제국 자치를 약속했습니다.
허나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1919년 12월 23일 대영제국 정부는 인도정부제정법을 돌연 발표해 인도제국 행정구역을 새롭게 제정한다는 명분으로 인도제국을 대영제국 식민지로 존속시켰습니다. 이에 인도자치를 준비하던 인도 국민회의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부는 이를 수용하며 인도 국민회의 내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인도제국 자치권은 물건너갔습니다.
-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
1919년 12월 23일 인도정부제정법 이전에도 대영제국은 인도제국의 자치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인도제국 정부는 1915년 인도제국방위제정법을 체결하며 반란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세력은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인도인들을 삼엄하게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독립의 이야기가 나오면 병력을 보내 탄압했습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며 대영제국은 인도제국의 자치권을 보장하며 전쟁자금 세금을 징수했는데 전쟁이 끝난 1919년에도 전쟁자금 세금을 여전히 징수했습니다. 이에 인도인들이 반발하자 인도제국 정부는 집회금지법을 통과해 시위를 불법행위로 규정하며 무력진압을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편자브ਪੰਜਾਬ 암리차르ਅੰਮ੍ਰਿਤਸਰ의 비무장 시위를 학살한 사건입니다. 1919년 4월 초 암리차르ਅੰਮ੍ਰਿਤਸਰ에서 반영독립시위가 일어났고 인도제국 정부는 인도제국군을 파견해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ਅੰਮ੍ਰਿਤਸਰ에 있는 잘리안왈라 공원에서 비무장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인도제국 군대는 암리차르ਅੰਮ੍ਰਿਤਸਰ의 시민 모두를 반역자로 규정지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살했습니다. 이 학살로 약 1000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약 4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학살 사건은 인도제국에게 절대 자치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대영제국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고 인도 독립운동가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비협력운동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 사건으로 대영제국 정부에 우호적이며 협력하던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대영제국에게 정면으로 대항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는 17세에 대영제국 케임브리지 법대에 입학해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인도인으로 대영제국 정부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질서를 정의로운 질서로 생각했지만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 사건으로 대영제국의 탐욕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영제국의 변호사를 포기하고 고국으로 귀국해 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때 그는 간디를 존경했고 그를 찾아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916년 고국으로 귀국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역시 인도제국 자치를 믿고 대영제국을 도와 인도원정군을 결성했지만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 사건과 인도정부제정법을 목격하고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아프리카 연방 시절 인도인들을 도왔던 방법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인도를 절대 놓지 않는 대영제국 정부에 대항해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는 비협력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때 그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항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20년부터 비협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반영 인도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920년부터 비협력운동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인도제국 지방자치단체 단원들의 대규모 사임, 납세 거부, 투표 참여 거부, 파업 등을 주도하며 인도제국 행정을 마비시켰습니다. 허나 1922년 인도제국 정부가 식량에 세금을 더 부과하자 1922년 2월 4일 차우리 차우라चौरी चौरा에서 무장 인도독립운동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인도제국 군경과 무력충돌을 벌였습니다. 차우리 차우라 사건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인도 독립운동 세력과 인도제국 정부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바로 체포되었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았도 인도제국 정부도 별다른 명분을 찾지 못해 그를 즉각 하옥시켰습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구자라트ગુજરાત 주 아마르바드અમદાવાદ에 위치한 사바르마티 아쉬람સાબરમતી આશ્રમ에서 청년 인도잡지를 발간하며 전인도인들의 단결과 비협력운동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인도 인재들이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다양한 인도 정당이 등장하며 인도 독립운동이 촉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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