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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다이쇼 로망] 일본제국의 번영과 불안

by 롱카이. 2022. 12. 1.
  •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
1920년대 아사쿠사 로쿠
1920년대 아사쿠사 로쿠

일본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로 성장하던 일본제국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막대한 국가 재정 지출로 잠시 경제가 휘청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제국은 동아시아의 유일한 산업국가인 점을 이용해 독점 판매로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일본제국 국가 재정은 순식간에 탄탄해졌고 일본제국의 사업가들은 성공한 벼락부자들이 떼로 나왔습니다. 미합중국이 제1차 세계대전 전쟁특수로 광란의 20년대를 맞이했던 것처럼 일본제국도 중산층 급격히 성장하고 이들이 일본제국의 경제를 주도했습니다. 일본제국 중산층들은 미국의 광란의 2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한 사치를 즐겼습니다.


  • 다이쇼 로망
화양절충 패션
화양절충 패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은 역대 호황기를 맞이했습니다. 일본제국의 중산층들은 사치품을 향유했고 일본제국의 여성들은 패션을 선도했습니다. 여성들은 기존 일본 복식에 유럽(미국)식 의복을 덧입은 화양절충和洋折衷을 선도했습니다. 또는 완전히 서양식 의복으로 바꾼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던걸, 모던보이라 불렸습니다. 더불어 음식에도 화양절충和洋折衷을 적용해 메이지 유신 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경양식을 한층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어 일본 거리는 기존 일본식 가옥이 해체되고 유럽식 건물들이 길거리를 장악했습니다.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을 비롯한 일본제국 대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했고 대도시에 사는 일본 중산층들은 평화롭고 화려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 다이쇼 데모크라시
쌀 소요사태로 파괴된 쌀 도매점
쌀 소요사태로 파괴된 쌀 도매점

도쿄東京을 비롯한 일본제국 대도시 부촌에서 다이쇼 로망을 즐기는 동안 그 외 지역에서는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1917년 러시아 내전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부상하자 일본제국은 식민지 철폐와 군주제 폐지를 외치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을 만주와 연해주의 러시아 영토로 파병했습니다. 일본제국 정부는 시베리아로 파병한 일본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쌀을 매수했습니다. 이를 간파한 도매상들은 담합해 쌀을 매점해 쌀 가격을 폭등시켰습니다. 그러자 쌀을 구매해 먹고 살던 일본제국 신민들은 급등한 쌀 가격에 반발하며 도매상들과 충돌을 벌였습니다. 소비자와 도매상 간의 갈등은 1918년 일본제국 본토 전역으로 퍼져갔고 일본제국 정부는 언론통제로 이를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민들은 더 반발했고 결국 1918년 데라우치 내각이 사임하고 다카시 내각이 등장해 쌀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조선 식민지에 산미증식계획을 실행해 조선 식민지에서 다량의 쌀을 낮은 가격에 구매했습니다. 이는 일본제국 본토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쌀을 잃은 조선인들은 잡곡으로 끼니를 떼우며 일본제국에 대한 분노를 삼켰습니다. 또한 쌀 소동 사태 동안 일본제국의 빈민들은 굶으며 정부에 불만을 표했습니다.

일본 공산주의 선전 포스터
일본 공산주의 선전 포스터

일본제국의 중산층들은 사치를 누리는 동안 일본제국의 빈민 노동자들은 하루 끼니를 굶으며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궁핍한 노동자들이 늘어나자 일본 공산주의자들은 그 사이를 빠르게 잠식했습니다. 일본 공산주의들은 천황을 제거하고 노동자들이 독재지배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립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천황과 일본 내각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일본제국 정부는 일본 공산당이 급확산하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했습니다. 일본 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불만으로 1923년 12월 27일 히로히토 천황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허나 암살은 실패했고 현장에 일본 공산주의자 난바 다이스케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포받았습니다. 일본제국 정부는 천황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어 내각이 교체되었습니다. 허나 새 내각은 관료 귀족원 의원의 선출로 선발된 내각이었고 민주주의 선거를 원하던 민중은 내각을 다시 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1920년대 일본제국 내각
1920년대 일본제국 내각

1923년 일본제국 민중은 내각 재선거를 외치며 제2차 호헌운동을 주도했고 일본제국 내각은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새로 출범했습니다. 새로 출범한 내각은 1925년 보통선거법을 재정해 만 25세 이상의 성인 남성 모두에게 참정권을 주었습니다. 허나 만 25세 이상 성인 남성 외 사람들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으면서 제한된 보통선거로 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제국 정부가 민주주의를 실현할 의향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도시의 주류였던 가난한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고 보통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주의 입김이 강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가토 다카아키 내각은 치안유지법을 보통선거법과 동시에 통과시켜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이 맹렬하게 저항하자 치안유지법을 더 강화시켜 군경을 투입해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사형에 처하는 강경책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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