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을 대비한 무장중립국

스위스 연방은 유럽에서 가장 험준한 알프스 산맥 중심지에 위치한 국가로 험악한 지형에 비해 자원이 전무해 그 어떤 국가의 이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스위스 연방은 그 점을 이점으로 작용시켜 중립국을 천명했고 20세기 초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으로 유럽에 전운이 감돌 때 유럽 국가들에게 중립국임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내심 스위스 연방의 참전 혹은 합병을 기대했고 스위스 연방군의 전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스위스 연방은 1907년 스위스 연방군을 창설한데 이어 1911년 군 개혁을 통해 스위스 연방군의 규모를 키웠습니다. 이로서 스위스 연방은 동맹국과 협상국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1914년 8월 1일 독일제국이 프랑스 제3공화국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스위스 연방이 대비했던 대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독일제국은 같은 게르만어를 쓰는 스위스 연방의 참전을 내심 기대했고 스위스 연방 내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독일제국과 함께 프랑스 제3공화국을 공격할 것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연방 정부는 중립국 위치를 고수했습니다. 대신 스위스 연방 국경에 군대를 배치해 외부군의 침공에 대비했습니다. 덕분에 독일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스위스 연방의 영토를 함부로 침범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스위스 연방 영토 내에 포탄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 이탈리아 전선에서 스위스에 포탄이 떨어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눈이 너무 많이 와 국경 분간이 어려운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이 포격을 실시했는데 이탈리아군의 포탄 중 일부가 스위스 연방에 떨어져 한 명의 스위스 연방군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즉각 스위스 연방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스위스 연방에 총성과 포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스위스 연방은 전쟁의 화마가 휩쓴 중유럽 중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연방이 얻어낸 평화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었습니다.
- 유럽인의 도피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외쳤습니다. 전쟁에 참전하자는 의견은 순식간에 주류 여론이 되었고 참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로 낙인찍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징집되었고 전쟁터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참전을 거부한 사람들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지킨 스위스 연방으로 도피했습니다. 스위스 연방도 만성적인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망쳐오는 유럽인들을 반겼습니다. 스위스 연방 정부는 한술 더 떠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의 전쟁포로들을 스위스 연방이 대신 수용해주겠다고 동맹국과 연합국에게 제안했습니다. 전쟁포로들을 먹여 살리는데 골머리를 앓던 동맹국과 연합국은 그 제안을 환영했고 스위스 연방은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의 전쟁포로들을 수용했습니다. 이로서 스위스 연방은 전쟁을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과 전쟁포로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연방으로 도망쳐온 사람들 중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있었습니다.
- 다다이즘의 탄생

스위스 연방은 수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상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당시 한창 전쟁 중이던 유럽 국가들은 언론을 통제하며 국가의 이념에 위배되는 이념을 모두 억압했습니다. 특히 모두 함께 잘 살자고 외친 사회주의는 전쟁 중이던 국가들에게 민족주의에 위배되는 위험한 사상으로 낙인찍혔고 잔혹하게 탄압되었습니다. 이에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스위스 연방으로 도망쳤고 사회주의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전쟁이 싫은 사람들도 사회주의자들을 따라 스위스 연방으로 도망쳤습니다. 특히 독일제국과 루마니아 왕국의 반전주의자들이 스위스 연방으로 도피했고 스위스 연방에서 반전反戰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들은 예술로 반전을 표현했습니다. 반전주의자들은 1915년 스위스 연방의 취리히Zürich에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야유하는 새로운 예술 학파를 창조했습니다. 그것이 다다이즘[게르만어:Dadaimus / 영어: Dadaism]입니다. 다다이즘은 다다DADA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다DADA의 유래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1916년부터 스위스 연방에 다다DADA라는 표현이 널리 알려졌고 예술가들은 새 예술을 다다DADA로 불렀습니다.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다다DADA에 영향을 받아 기존 질서를 부수고 무질서를 표현하는 다다이즘 미술에 뛰어들었습니다.

1916년 7월 14일 취리히Zürich에서 열린 제1차 다다 모임에서 독일인 예술가인 후고 발Hugo Ball은 다다 선언Dada Manifesto 저술을 완성하고 와그 할Waag Hall이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이로서 제1차 세계대전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신생 예술의 이름은 다다이즘으로 확고히 굳어졌고 스위스 연방을 넘어 전세계로 다다이즘이 퍼졌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위스 연방에 살던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다다이즘을 고국에 전파했습니다. 예술가의 귀환과 함께 전쟁에 지친 프랑스 제3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중심으로 다다이즘이 확산되었고 큰 희생 끝에 결국 전쟁에서 패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의 허무함과 무기력함, 패전의 분노를 다다이즘에 녹아냈습니다. 이로서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 예술의 새 흐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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