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청 붕괴와 한족국가 중화민국
대명을 이어 중화를 통일한 대청은 만주족, 몽골족, 한족, 위구루족, 티베트족을 하나의 국가 안에 화합시킨 제국이었습니다. 대청은 다섯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집중했고 아이신기오르 황제 아래에 다섯 민족이 정체성을 유지하며 공존했습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구와 문화가 압도적인 한족이 대청을 지배했고 대청 말기에는 한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특히 대청을 건국한 만주족은 시간이 지나며 한족에 동화되었고 변발과 의복 외 만주족 정체성을 상실해갔습니다. 다른 민족 역시 이렇게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리고 대청이 붕괴되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중화민국은 민족주의라는 세계의 이념을 받아들였고 중화민국을 한족국가로 규정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은 만주족을 만리장성에서 몰아내자는 주장을 하는 등 중화민국을 한족의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이후 중화민국은 거대한 대청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다섯민족을 다시 합치며 오방기를 국기로 지정하는 등 대청의 정신을 이어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대청 영토를 한족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에 한족 외 민족들은 중화민국에서 독립해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 민족 독립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대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비한족 민족들은 서둘러 민족 독립을 준비했습니다. 마침 한족은 군벌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비한족 민족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1911년 외몽골이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대몽골국으로 독립했고 1912년에는 티베트가 독립했습니다. 위구르는 윈난성 한족 군벌인 양쩡신이 회족(무슬림) 군대를 이끌고 신강군벌을 세워 위구르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꽤 훌륭하게 신강군벌을 운영했고 위구르인들은 한족 지배에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 몽골 독립
1911년 12월 1일 몽골 왕공들은 외몽골에서 중화민국군을 추방하고 12월 29일 젭춘담바를 칸으로 옹립해 대몽골국(복드 칸국)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대몽골국으로 독립한 외몽골은 내몽골도 독립시켜 외몽골과 내몽골이 통일함으로서 대원을 다시 한번 건국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중화민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대몽골국은 러시아 제국과 일본제국에게 도움을 빌려 주권을 유지했습니다. 대몽골국은 중화민국과 충돌해 내몽골을 합병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주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고 이에 1915년 캬흐타 협정으로 대몽골국이 러시아 제국의 자치국이 되어 주권을 겨우 유지했습니다.
- 외몽골 출병
허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공중분해되었고 뒤를 이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캬흐타 조약을 무효화했습니다. 그러자 안휘군벌은 외몽골로 눈을 다시 한번 돌렸습니다. 대몽골국은 안휘군벌에게 자세를 낮추며 주권을 부탁했지만 쉬수정은 1919년 11월 7일 안휘군벌 병력을 대몽골국 수도 후레Их Хүрээ(현 울란바토르Улаанбаатар)로 출병시켜 강제합병했습니다. 쉬수정은 복드 칸을 포위하고 몽골지역을 북양정부 영토로 합병해 통치했지만 러시아 내전의 백군이었던 로만 폰 웅게른슈텐베르크 남작이 군대를 이끌고 쉬수정의 안휘군벌을 격파한 후 외몽골을 점령해 중화민국은 외몽골을 상실했습니다.
- 티베트의 불완전한 독립
대청 지배 하에 티베트 왕국은 대청의 제후국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대청이 멸망하자 티베트 왕국은 대청이 사라졌으니 자치를 할 필요가 없다며 1912년 중화민국군을 축출하고 티베트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허나 티베트는 국력이 매우 약했고 달라이 라마의 신정 정치를 고집해 근대화를 원한 유럽 국가들로부터 외면받았습니다. 인도제국이 티베트에 제한적인 지원을 했지만 티베트 독립은 인정하지 않았고 중화민국 군벌 역시 티베트를 무시했습니다. 티베트 역시 티베트인의 영토를 전부 가진 것이 아닌 라싸와 히말라야 일대 일부만 가지고 있었고 1913년/1914년에 체결한 심라 조약에 티베트 스스로 중국의 종속국으로 인정해 독립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신해혁명 직후 한족인 양쩡신은 신강군벌을 설립한 후 신강군벌의 성장을 꾀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이 신강군벌로 도망쳐오자 모두 체포해 적군에게 넘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으며 신강군벌의 경제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양쩡신은 위구르 민족주의를 허용했고 위구르인들은 동튀르키스탄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해갔습니다.
양쩡신의 부하였던 진수런은 한족주의자로 신강군벌이 한족 군벌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양쩡신 체제 하에서 신강군벌은 동튀르키스탄화 되었고 불안해진 진수런은 1928년 양쩡신을 암살했습니다. 그리고 위구르인들은 이에 분노해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진수런은 정치감각이 무능했고 이를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1931년 2월 중국인 경찰이 위구르인 소녀를 추행하다 폭행사 당하자 진수런은 위구르인들을 무잡이로 학살하는 폭정을 펼쳤고 위구르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해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가군벌 지도자인 마중잉과 연합해 진수런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1931년부터 신강군벌은 여러 세력이 난립하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혼란 속에 위구르 지식인들은 1933년 투르판吐鲁番 지역에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설립해 위구르 민족국가를 건립했습니다. 하지만 위구르 제1공화국 내부에서 위구르족, 한족, 키르키스족 간의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성스차이는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에 사시사건 개입하며 사실상 그의 군벌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1934년 마중잉이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침공해 멸망하며 소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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