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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3.1 운동] 대한 독립 만세

by 롱카이. 2022. 11. 30.
  • 무단통치武斷統治
일본제국 해군
일본제국 해군

일본제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너무 늦게 근대화와 제국주의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제국주의 국가로 막 성장할 때 이미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했습니다. 일본제국은 일본제국 번영을 위해 중국 전체를 흡수하고 싶어했고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을 차지하게 두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일본제국은 조급해했고 시간을 단축해 빨리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은 식민지 확장을 급하게 진행했습니다.

일본제국 헌병대
일본제국 헌병대

일본제국은 1872년 류큐 섬을 점령하고 1895년 타이완 섬을 식민지화하고 1907년 사할린 섬 남부를 식민지화하며 식민지 확장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며 중국 진출로를 확보했습니다. 일본제국에게 조선 식민지는 중국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일본제국은 조선 합병 직후 조선을 완전히 일본화해 일본군이 유사시 바로 베이징北京으로 진격할 수 있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일본제국은 조선을 일본화하기 위해 무력으로 조선 정체성을 말소하고 일본 정체성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은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조선 식민지 통치 이념으로 선택했습니다. 일본제국은 헌병대를 조선 식민지로 보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헌병대가 조선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

당연히 이는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어떤 적법한 절차와 법률없이 일본제국 헌병이 재산을 강탈하고 조선인들을 억압하자 조선인들의 반일감정은 증가했고 많은 조선인들이 고종 황제를 다시 황제 자리에 옹립해 대한제국 부활을 꿈꿨습니다. 일본제국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를 함부로 건들면 조선인의 거센 반발이 있을 것을 우려해 그들을 함부로 건들지는 못했습니다.


  • 고종 독살설과 파리 강화회담
고종 황제가 커피를 즐긴 덕수궁 정관헌
고종 황제가 커피를 즐긴 덕수궁 정관헌

대한제국 시절 고종 황제는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대한제국의 자주주권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일본제국에게 발각되었고 고종 황제는 순종 황제에게 황권을 넘겨주고 덕수궁에 머물렀습니다. 허나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는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시신을 염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사망 직후부터 시신 부패가 심하게 진행되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종 황제가 한약, 식혜, 커피를 마시다 독살당했다고 추측했습니다. 황좌에서 내려와 덕수궁에서 몰래 항일 대한제국 주권운동을 진행한 고종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조선 전체로 퍼졌고 사람들은 구국을 구하려고 한 황제의 사망소식에 분노했습니다.

임시정부 대표단
임시정부 대표단

또한 조선인들은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담이 열렸다는 소식을 받았으며 김규식과 임시정부 대표단은 파리 강화회담에 참석해 대한제국 자주주권 인정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김규식은 미합중국과 일본제국에 의해 파리 강화회담 자리에 거부당했고 그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이에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른 독립을 희망한 조선인들은 분노했고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중화민국 지린吉林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2월 1일 무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2월 8일에는 도쿄東京에서 조선인 유학생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며 조선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 3.1 운동
고종 황제 장례식
고종 황제 장례식

조선 독립이라는 뜻에 따라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 장례식 예행일에 기미독립운동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조선 총독부가 눈치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시위를 준비했고 전세계에 조선이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아침 고종 황제 장례식 예행식이 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종 황제의 서거를 목격하러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연되어 오후 3시에 29인이 모였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한편 학생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약속시간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당황했지만 경신학교 정재용이 대신 팔각정에 올라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하늘로 던지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3.1 운동
3.1 운동

그리고 이들은 바로 길거리 행진하며 시위했습니다. 시위대는 두갈래로 나뉘어 종로를 누볐습니다. 그들은 작은 태극기를 하늘로 던지고 손에 태극기를 들며 대한 독립의지를 사방에 알렸습니다. 시위대는 미국 영사관으로 이동해 미국에 대한 독립 의지를 알렸지만 미국 영사관은 문을 닫고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일본제국 헌병은 당황해 대응하지 못하다 이후 총검을 들고 시위를 무력 진압했습니다. 그럼에도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은 멈추지 않았고 3월 안에 빠르게 조선 전국과 만주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제국은 헌병대를 출동시켜 그들을 무력 진압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 운동이 불러온 변화
미국 언론에 보도된 3.1 운동
미국 언론에 보도된 3.1 운동

3.1 운동은 3월을 넘어 수 달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제국은 조선 식민지 내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곳은 모두 헌병대를 보내 강경진압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미합중국에게 일본의 행위를 규탄하고 독립 혹은 자치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합중국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미합중국 정부는 오히려 일본제국 정부에게 조선인들이 독립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3.1 운동을 묵살하며 일본제국 식민지배 유지를 지원했습니다. 때문에 3.1 운동은 실패했습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지만 3.1 운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조선인들은 전세계 각지에 임시정부를 설립했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1919년 4월 11일 중화민국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쑨원은 3.1 운동을 감명깊게 바라봤고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은 3.1 운동의 실패로 유럽과 미합중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중화민국과 연대해 독립을 꾀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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