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인 해방

수천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 내의 부족들은 타부족을 공격해 포로를 잡은 후 이슬람과 유럽에 노예로 파는 노예무역을 시행했습니다. 때문에 아프리카인 노예는 아라비아 등지로 이동했고 대항해 시대 이후 아프리카 항구 식민지를 건설한 유럽 회사들은 아프리카 노예를 구매해 신대륙에 팔아넘겼습니다. 때문에 신대륙에 아프리카인이 유입되었고 일부 카리브 해 제도는 현지인이 사라지고 아프리카인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 중 한 곳이 프랑스령 아이티로 프랑스령 아이티는 1804년 아이티 혁명에서 승리해 독립했습니다. 아이티 공화국은 세계 최초 아프리카인 공화국이 되었고 이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주 주권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19세기 대영제국은 아프리카 대륙 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하면서 영국 청교도 교회를 남아프리카로 파견했습니다. 대영제국의 의도는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훌륭한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기독교는 인간평등을 가르쳤고 기독교를 접한 남아프리카인들은 독립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남아프리카인들은 에티오피아 운동을 일으켜 아프리카 독립 교회를 설립했고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그 중 지식인들은 대영제국 본국으로 가 런던London에서 아프리카의 자식들Sons of Africa이라는 조직을 설립해 아프리카 독립운동을 책임졌습니다.
- 범아프리카

1897년 런던London에서 조지 패드모어와 남아프리카 지식인들은 범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지식인들은 유럽은 백인이 주권을 가지고 지배하듯이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인들이 주체적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를린 회담을 부정하고 아프리카 부족들이 힘을 합쳐 범아프리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령 트리니다드 토바코 출신인 헨리 실베스터 윌리엄스는 범아프리카 협회에 참여하며 아프리카 대륙에 한정하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아프리카인들도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듀 보이스 역시 아메리카 아프리카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범아프리카 협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1900년 4월 파리 박람회가 열리자 1900년 7월 25일 범아프리카 협회는 웨스트민스터 타운홀에서 제1차 범아프리카 회담을 열어 세상을 향해 아프리카 노예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아프리카 자치를 허용하라는 요구사항을 알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파리 박람회의 아프리카 전시회를 비판했습니다. 범아프리카 회담 내용은 대영제국과 미합중국 신문에 기고되었고 범아프리카 회담에 참석한 지식인들 일부는 자메이카와 트리니다드 토바코, 미합중국으로 이주해 활발한 저널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 제1차 범아프리카 의회

제1차 범아프리카 회담 이후로도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아메리카 국가, 대영제국에서 아프리카인 자치와 아프리카인 인식 개선운동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아프리카 전구에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일부는 식민지군으로, 일부는 인력 물자수송으로 보급을 책임지는 역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속 아프리카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국가들이 자치권을 약속받았듯이 아프리카 식민지들도 자치권을 허용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듀 보이스와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 생테티엔Saint-Étienne에 머물며 승전국에게 아프리카 문제를 알리고 아프리카 자치권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대영제국 정부는 이들을 진압했고 파리 강화회담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파리 강화회담에서 아프리카 식민지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왕국,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직접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해 아프리카 자치를 불허했습니다. 미합중국 역시 승전국을 지지하며 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문제를 외면했습니다.
- 제2차 범아프리카 의회

파리 강화회담에서 억압받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분노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1921년 8월 28일/29일/30일 런던London, 파리Paris, 브뤼셀Brussels에서 제2차 범아프리카 의회가 열렸고 듀 보이스는 더 크리시스The Crisis라는 잡지를 출판해 아프리카인 민족을 설명하고 그들이 겪는 문제를 고발했습니다. 허나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벨기에 왕국은 그들의 목소리를 묵살했습니다.
- 제3차 범아프리카 의회, 제4차 범아프리카 의회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1923년 런던London과 리스본Lisbon에서 제3차 범아프리카 의회를 열고 1927년 뉴욕New York에서 제4차 범아프리카 의회를 열며 더 크리시스The Crisis로 아프리카 민족 문제를 상세히 고발했습니다. 허나 강대국은 여전히 그들의 문제를 무시했고 그들은 외로운 싸움을 지속했습니다. 허나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범아프리카 의회의 분전은 아프리카 식민지 지식인들 마음에 불을 지폈고 아프리카 독립운동은 조용히 진행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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