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영 독립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사태 이후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아일랜드인에게 대영제국 정부는 무책임을 넘어 아일랜드를 멸하려는 악의 세력으로 보였고 실제로 대영제국 정부는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한 사과 대신 무력진압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인은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꿈을 품었고 누구보다도 더 활발하게 독립투쟁을 벌였습니다.
- 자치와 독립
아일랜드 독립세력은 평화 독립 세력과 무장 독립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평화 독립 세력은 자치권을 추구하며 오랜 기간 노력 끝에 대영제국 의회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고 아일랜드 자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한 진전을 보였지만 이내 한계에 부딫혔습니다. 반면 무장 독립 세력은 완전 독립을 원했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무장 독립 세력인 아일랜드 공화국은 1916년 부활절 봉기로 무장 투쟁을 했지만 시민들에게 비난받고 자멸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절 봉기 이후 아일랜드 무장 독립세력은 지지 기반을 잃었고 평화 독립 세력이 힘을 얻어 자치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은 끝내 아일랜드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아일랜드에게 주어진 기회
대영제국은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ian and Ireland을 유지하며 아일랜드를 브리튼 직속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인에 대한 차별은 유지했고 일체의 자치권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일랜드인의 여론은 다시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쏠렸고 여론을 얻은 아일랜드 공화국은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양성하며 아일랜드 무장 독립을 다시 준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강대했던 대영제국은 눈에 띄게 허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영국원정군은 전쟁이라면 반발했습니다. 대영제국 시민들 역시 더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영제국 군사력은 약해졌고 반전이 사회에 만연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이 상황이 다시는 없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바로 독립전쟁을 준비했습니다.
- 아일랜드 독립 전쟁
1919년 1월 21일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충분한 양의 무장을 준비한 후 보안대 경찰을 살해하고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빠르게 진격하며 아일랜드 섬에 있는 대영제국 정부 시설과 군대, 은행을 공격하고 전쟁물자와 군자금을 약탈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게릴라전으로 아일랜드 섬에 있는 대영제국 정부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옛 보어전쟁 때 보어군이 수행했던 전술을 활용해 영국군을 교란했습니다.
대영제국 정부는 브리튼 섬의 영국군을 아일랜드 섬으로 파병해 이들을 진압했습니다. 영국군은 아일랜드 민간인을 이유없이 학살했고 도시의 건물과 농장을 닥치는데로 불태웠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군과 대영제국 정부의 만행에 분노해 전국 파업과 납세 거부, 불복종, 아일랜드 공화국군 지원으로 응수했습니다. 이에 영국군은 보이는 아일랜드인은 족족 체포해 수감했습니다. 그럴수록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정신은 커졌고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일부는 민간인 신분으로 게릴라전에 참전했습니다. 덕분에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만성적인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며 함께 뜻을 모아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부터 아일랜드 섬에 있는 수많은 건물은 불탔고 여기저기서 총격과 포격 소리가 들렸습니다. 영국군은 아일랜드인을 학살했고 아일랜드인은 게릴라전, 테러, 약탈로 대영제국을 괴롭혔습니다. 북아일랜드 청교도인들은 아일랜드인의 폭력 행위를 규탄했지만 오히려 반발을 사 탄압당했습니다. 1921년 전쟁이 일어난지 2년이 되자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병기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잉글랜드 본토의 항구를 직접 타격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습니다. 그래서 리버풀 항구 등 잉글랜드 항구를 급습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병기를 약탈하며 항구를 불태우고 파괴해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 아일랜드 자유국
이에 질린 대영제국은 아일랜드 공화국군에게 휴전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1921년 12월 6일 대영제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 공화국은 자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대영제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 섬에서 북부 6개 주를 제외한 26개 주는 대영제국 왕실에 충성하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자치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영국인 청교도인이 많은 북부 6개 주는 여전히 대영제국 본토 영토로 남았습니다.
그래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대영제국 직접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대영제국은 1921년 대영제국-아일랜드 조약 이후로 한동안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ian and Ireland이라는 명칭을 고집했지만 아일랜드를 북아일랜드라고 변명했고 그마저 나중에 북아일랜드라고 정정했습니다. 아일랜드 자유국 정치인들은 바로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을 수립해 자신들의 헌법을 세우며 새 나라를 만들어갔습니다.
- 아일랜드 내전
하지만 대영제국-아일랜드 조약의 내용 해석에 따라 아일랜드는 다시 한번 분열되었습니다. 급진파는 대영제국-아일랜드 조약에서 대영제국 국왕에게 충성을 할 필요가 없으며 아일랜드 완전 독립을 원한 반면 온건파는 남아프리카 연방,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처럼 일단 자치령으로 시작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더불어 아일랜드 북부 6개 주를 대영제국 소속으로 두느냐, 아일랜드 자유국 영토로 두느냐를 두고도 분열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 대부분은 아일랜드 완전 독립과 통일을 주장했고 찬성파는 우선 대영제국-아일랜드 협정에 순응하며 아일랜드 내의 빈부격차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1922년 7월 28일 아일랜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대영제국 정부는 좋아하며 조약 찬성파를 지원했고 아일랜드 자유국의 군대인 아일랜드 국군은 대영제국이 제공한 장갑차와 우수한 병기로 반대파를 공격했습니다. 반면 반대파 세력의 군대였던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병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게릴라전을 시도했지만 강력한 아일랜드 국군에게 속속히 진압되어 1년 만에 패배했습니다. 아일랜드 내전의 결과로 아일랜드 섬은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 분리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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