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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영풍함 사건] 천하를 논하다

by 롱카이. 2022. 11. 30.
  • 제2차 호법운동
호국전쟁
호국전쟁

1915년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정벌하려고 시작한 제1차 호법운동(호법전쟁/호국전쟁)이 실패하자 쑨원은 상하이上海로 피신했습니다. 그는 상하이上海에서 은거하며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러다 1919년 5.4운동이 천하를 뒤흔들자 쑨원은 중화 독립운동에 대한 희망을 다시 품고 1919년 10월 10일 중국국민당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세력을 모아 다시 한번 북벌해 중화민국을 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 쑨원과 천중밍
쑨원
쑨원

쑨원이 상하이上海에서 은거하는 동안 광둥廣東지방은 계계군벌 루룽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루룽팅은 계계군벌 세력을 확장하며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에 비견하는 군벌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허나 루룽팅은 국정을 농단하며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의 세력은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이에 쑨원은 루룽팅의 계계군벌을 차지한 루룽팅을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쑨원의 오랜 친구인 천중밍은 1920년 6월 월계전쟁을 일으켜 루룽팅을 축출했습니다. 천중밍은 월계전쟁에서 승리해 광둥廣東과 광시廣西 전체를 장악한 광동정부를 수립했습니다.


  •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청사진
천중밍
천중밍

쑨원과 천중밍은 혼란스러운 중화를 재통일해 평정하자는 공통 목표를 공유했습니다. 때문에 둘은 호법운동 때 같은 뜻을 가짐을 확인하고 함께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쑨원과 천중밍은 통일된 중화를 어떻게 통치할지를 두고 의견 차이를 보였습니다. 쑨원은 북양정부를 전복하고 중화를 하나의 세력으로 통일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천중밍은 미합중국처럼 중화민국을 연방정부로 두어 군벌세력이 연방자치를 하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쑨원은 북양정부를 향해 북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천중밍은 북양정부와 타협점을 찾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 영풍함 사건
쑨원과 쑹칭링
쑨원과 쑹칭링

쑨원은 연방정부를 외치는 천중밍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북벌을 위해서는 그의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천중밍 역시 군대를 보전하고 싶었지만 북벌을 위해 군대를 요구하는 쑨원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결국 1922년 3월 21일 천중밍은 쑨원의 북벌 자금책인 덩컹을 암살했고 이에 쑨원은 5월 천중밍을 군벌 총사령관에서 해임시키고 군벌을 규합해 북벌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천중밍은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922년 6월 13일 쑨원과 아내 쑹칭링이 머문 광저우 총통부를 공격했습니다. 쑨원은 겨우 탈출했고 쑹칭링은 천중밍 군대에 맞써 싸우다 겨우 목숨은 부지했지만 유산했습니다.

영풍함
영풍함

쑨원은 군벌과 외세에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들 쑨원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때문에 쑨원은 휘하 해군이 보유한 영풍함에 탑승한 후 천중밍 군대 기지를 포격하며 대항했습니다. 이어 장제스와 쉬충즈가 쑨원을 지원하러 출동했고 쑨원은 장주요새를 점령했습니다. 허나 천중밍 군대는 장주요새를 공격하며 함락해갔고 쑨원은 상하이上海로 퇴각했습니다.


  • 국공합작
국공합작
국공합작

쑨원은 천중밍의 배신에 낙담했고 그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그래서 쑨원은 그의 부하인 장제스에게 선두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천중밍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습니다.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도움을 청하며 전쟁 준비를 진행했는데 천중밍이 이를 눈치채고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에 쑨원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밀약을 폭로했습니다.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의 눈치를 보던 바이마르 공화국도 쑨원과의 관계를 바로 부정했고 쑨원은 대영제국, 미합중국, 바이마르 공화국 모두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쑨원은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소련은 이를 환영하며 그 대가로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이 합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영풍함 사건 때 유일하게 쑨원을 지지했고 군벌의 탄압으로 보호해줄 큰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삼자의 요구가 들어맞았고 쑨원은 소련의 요청대로 1924년 국공합작을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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