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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대전쟁으로 가는 길: 유고슬라비아 왕국] 흔들리는 통일왕조

by 롱카이. 2022. 12. 2.
  • 재건되는 국가
세르비아 왕국(주황색)과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붉은선)
세르비아 왕국과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붉은선)

세르비아 왕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국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벌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차르국에게 국토가 양분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1918년 미국원정군의 참전으로 세르비아 왕국은 가사회생했고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또한 1918년 10월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연합국에게 항복하기 전에 스스로 붕괴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립을 준비하던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유고슬라브 위원회를 결성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서 독립했습니다. 이후 유고슬라브 위원회는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 협력해 남슬라브 통일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이로서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을 건국했습니다. 그 후 파리 강화회담과 라팔로 조약으로 영토를 확정하며 마침내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숙명이었던 남슬라브 민족국가 건립을 완수했습니다.


  • 국가를 하나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
유고슬라비아 왕국 종교 분포 조사
유고슬라비아 왕국 종교 분포 조사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은 남슬라브인들을 한데 묶어 통일한 왕국이었습니다.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남슬라브가 단합하면 외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통일을 하고 보니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남슬라브인들은 같은 슬라브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열강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 남슬라브 문화가 희석되었습니다. 헤르체코비나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열렬한 신민으로 알라الله의 신실한 종인 무슬림이었고 크로아트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 하에 오랫동안 놓여 있어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남슬라브 통일운동을 주도한 세르브인들은 정교회를 믿었습니다. 세르브인들은 모름지기 슬라브인으로서 슬라브 종교인 정교회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러시아 제국처럼 정교회의 수호국임을 자처했습니다. 때문에 세르브인들은 남슬라브인들의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했습니다. 허나 세르브인들은 막대한 피를 흘린 대가로 얻은 통일왕조를 잃고 싶어하지 않았고 이는 다른 남슬라브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통적인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 주
전통적인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 주

그래서 남슬라브인들은 종교에 대한 논쟁은 가급적 피하고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에 대한 충성섬으로 뭉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은 국왕 페타르 1세에 대한 찬양과 충성심을 높였습니다. 또한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 영토를 각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나누어 주를 결정했습니다. 사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국경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사람들은 만족했고 이렇게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문제는 해결되는 듯 했습니다. 허나 이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정한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 주
개정한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 주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은 각 주에서 당을 만들어 중앙정부에서 활동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당이 만들어졌고 그 중에는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 등 각 민족을 대표하는 당들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서로 암암리에 경쟁했고 1920년 11월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을 건국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위기에 빠졌습니다.1920년 11월 28일 중앙정부는 여성 참정권을 두고 당의 투표를 열었습니다. 이에 사회민주당과 슬로벤 인민당은 여성 참정권을 지지했으나 극단주의 정당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에 민주당은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정당석의 대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이는 극단주의 정당의 반발을 샀습니다. 극단주의 정당은 세르브 출신 정당을 적극 지지했고 이에 크로아트 농민공화당이 반발했습니다. 크로아트 농민공화당이 반발하자 크로아트 공산당이 덩달아 반발하고 마케도니아 공산당도 가담했습니다. 그러자 유고슬라브 무슬림기구도 크로아트 농민공화당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힘이 실린 크로아트 농민공화당은 민주당의 의견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더 나아가 국왕의 명령을 어길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왕자는 1921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축제일인 비도브단Видовдан에 전통적인 영역을 삭제하고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주를 새로 확립해 각 주마다 자치권을 얻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왕자 알렉산드르 1세는 이렇게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 독재시대
유고슬라비아 왕국기
유고슬라비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정당들은 싸우기를 반복했고 국정은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1929년 1월 6일 페타르 1세가 사망하고 즉위한 국왕 알렉산드르 1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제군주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꾸었습니다. 국왕 알렉산다르 1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왕이 되어 국정을 운영했지만 독재정치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결국 1934년 국왕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 제3공화국 마르세유Marseille를 방문하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국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11세의 페타르 2세가 국왕이 되었고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가 섭정을 맡았습니다. 독재정의 권력은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에게 넘어갔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겨우 진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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