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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시작/강대국의 상황

[강대국의 상황: 독일제국 편-2] 세계정책과 제국의 충돌

by 롱카이. 2021. 12. 31.
  • 혈기왕성한 카이저의 등극

카이저 빌헬름 2세
독일제국 2대 황제 빌헬름 2세

빌헬름 1세 제위시절 비스마르크는 적극적인 독일 팽창을 반대해 많은 독일 민중들의 실망을 안겼습니다. 더불어 비스마르크의 독단적 결정은 정치적 적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1888년 비스마르크의 열렬한 후원자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이어 프리드리히 3세가 재위 99일 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자 빌헬름 2세가 독일제국을 이끌 카이저(Kaiser)로 등극했습니다.

 

대영제국 식민지 지도
대영제국 식민지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생각과 달랐고 적극적인 제국 팽창을 추구했습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퇴임시키고 자신이 독일 제국을 주도했습니다. 빌헬름 2세는 대영제국을 독일제국의 롤모델로 삼고 적극적인 식민지 확장을 추구했습니다. 더불어 독일제국을 대영제국을 제친 세계 제일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담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 대영제국의 해군을 뚫어라

제국주의 함대
제국주의의 상징 함대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팽창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독일제국이 유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력이 필수였습니다. 식민지에 주둔할 해군과 본국을 방어할 해군을 양성해야 했습니다. 더불어 독일제국에게는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대영제국 해군을 뚫어야 했습니다.

 

대영제국 왕립 해군 해군기지
1900년대 대영제국 왕립해군 군항

대영제국의 해군은 막강했습니다. 당시 대영제국은 Pax Britannica(팍스 브리타니카: 영국에 의한 평화)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전세계 바다를 장악하며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던 시기였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대영제국 해군에 대항해 해군력을 키우며 대결신청을 했지만 크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보유 함정을 대다수 잃고 대영제국에게 굴복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해군이 대영제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제국 해군과의 전쟁에서 대패하면서 대영제국 해군에 맞설 강자가 사라졌습니다.

 

유럽의 산업화 그래프
1750-1900년 강대국 산업화

대영제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은 대영제국의 압도적인 산업력과 경제력에서 나왔습니다. 1830년 이후 대영제국은 세계에서 압도적인 산업력을 보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막강한 산업력으로 키운 경제력을 해군산업에 투자해 주변국과 해군력 격차를 벌렸고 궁극적으로 강력한 무력을 동원해 세계를 지휘했습니다. 독일제국은 대영제국을 넘어서기 위해 대영제국을 턱밑까지 쫒아가기로 했습니다.

 

 

 

  • 대영제국의 70%까지 추격하라

대영제국 독일제국 건함경쟁 만평 포스터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의 건함경쟁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의 정책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무상교육을 받은 국민들은 제국의 인재로 자리잡았고 모든 분야의 산업 생산량은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빌헬름 2세는 이를 더 장려하며 독일제국의 더 빠른 성장을 이룩했습니다. 해군력을 강화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자 빌헬름 2세는 대양해군을 선포하며 전함 건함을 명했습니다. 카이저의 명령에 따라 독일제국은 더많은 함정을 제작했습니다.

 

대영제국은 독일제국의 빠른 해군력 증가에 놀랐습니다. 대영제국은 러시아 제국을 쓰러뜨리고 해군력으로 유럽을 압도했습니다. 유럽에서 잠재적 적을 누른 대영제국은 세계 바다에 집중했습니다. 대규모의 해군력을 전세계 바다로 분배하며 세계의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대영제국 바로 앞 독일제국에서 수많은 양의 전함이 출몰했습니다.

 

사실 대영제국은 새로 등장한 독일제국을 프랑스 식민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막아주기를 원했습니다. 독일제국이 대영제국 선으로까지 오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삼국협상을 이뤄 유럽 대륙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은 모든 면에서 프랑스와 러시아를 압도하며 2인자로 등극했고 결국 유럽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한 대영제국이 직접 나서야 했습니다.

 

강대국의 전함 수 그래프
1900년대 유럽 국가 함선 수

대영제국은 식민지에 집중하는 사이 독일에게 본토가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에 대영제국은 본토를 방어하고 독일제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많은 전함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제국 역시 대영제국의 해군력 강화에 대비해 전함을 더 많이 만들면서 대영제국과 독일제국 간 건함경쟁이 일어났습니다.

 

 

 

  • 독일제국의 고립과 돌파구

빠른 시간 내에 주변국을 압도한 독일제국은 주변국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독일제국을 둘러싼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은 서로 연합해 독일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를 삼국협상이라 합니다. 대영제국은 독일제국 앞바다를 포위했고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은 강한 육군을 독일 국경선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무역선을 봉쇄하며 독일제국의 수출과 수입을 방해했습니다. 이로 이들은 독일제국의 숨통을 틀어막았습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지도
독일의 숨통: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이에 독일제국은 동맹이 절실했던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중동을 보유하고 있어 독일제국의 석유 확보에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제국은 베를린에서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는 대영제국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수입을 할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은 이를 눈치채고 선수를 쳤습니다. 대영제국은 오스만 지배 하에 있던 쿠웨이트를 점령했습니다. 쿠웨이트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총리를 설득해 쿠웨이트를 대영제국 통치 하로 만들어 독일제국의 페르시아 만으로 진출을 막았습니다. 더불어 대영제국은 당대 많은 양의 석유를 생산하던 이란 카자르 왕조에게서 60년 무상 석유 채출권을 얻어 많은 양의 석유를 생산했습니다. 대영제국은 이 조약으로 독일의 석유 공급처를 차단하고 석유 생산량에서 독일제국과 격차를 벌렸습니다.

 

1900년 이후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의 충돌은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벌어진 두 제국의 전면전은 기존에 없던 파괴적인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 편은 그 외 전쟁의 영향을 끼친 다른 나라들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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