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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시작/강대국의 상황

[강대국의 상황: 독일제국 편-1] 제국의 등장

by 롱카이. 2021. 12. 30.
  • 독일 연방의 탄생

독일연방 지도
독일 연방(빨간선)

독일땅의 지배자 신성로마제국은 여러 도시국가들로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명목상으로나마 신성로마제국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806년 나폴레옹은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의 붕괴로 흩어진 독일에 라인동맹을 결성해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으로 두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게르만 제국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빈 체제를 결성해 게르만 국가 연방인 독일 연방을 건설했습니다. 연방국은 서로 적대행위를 금지했으며 외부 침입시 연방군을 결성해 서로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독일연방은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양분 통치 지배 하에 놓였습니다.

 

1848년 독일 혁명
1848년 독일 혁명

독일 연방은 한번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1848년 빈 체제에 반하는 자유주의 혁명이 서유럽을 덮었습니다. 프랑스의 2월 혁명을 시작으로 독일 전역에 1848년 혁명이 퍼졌습니다. 혁명가들은 게르만 민족통일과 봉건제 타파, 제헌의회 출범과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봉건 지배세력의 탄압에 혁명은 실패하고 혁명으로 일시중단된 독일 연방은 재가동을 시작했습니다.

 

  •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게르만 통일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1861년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즉위한 빌헬름 1세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을 이끄게 된 비스마르크는 당대 뜨거운 감자였던 독일통일 문제에 개입했습니다.

 

독일연방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빨간선-독일연방 파란색-프로이센 왕국 노란색-오스트리아 제국

당시 독일 연방은 단일국가 형성 방법을 두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안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통일하자는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하자는 소독일주의로 나뉘어져 격렬한 논쟁을 이어갔습니다. 두 독일 통일안을 두고 대독일주의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소독일통일주의의 프로이센 왕국은 주도권을 잡기 위한 대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와중 두 게르만 강대국의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덴마크 위기 지도
덴마크 위기 당시 독일연방이 얻었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1864년 2차 덴마크 위기 당시 독일 연방은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덴마크와 독일 연방 사이의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공국을 합병했습니다. 독일 연방의 강대국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양분했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명령으로 프로이센 공국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모두 점령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에 반발했고 1866년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축출했습니다. 그리고 소독일주의를 기조로 독일을 통일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연방의 절대자로 자리잡은 프로이센 왕국은 1866년 북독일 연방을 만들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과 북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과 북독일 연방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에서 이겼지만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우방국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저무는 해지만 여전히 유럽의 강대국이었고 프로이센 서쪽에는 유럽 육군 최강국 프랑스가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합공을 막아야 했던 프로이센은 패배한 오스트리아에 관대한 협상을 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프로이센의 우방으로 두었습니다.

 

  • 제국의 탄생

북독일 연방이 건설되자 민감하게 반응한 국가는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자국 바로 앞에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꺼려했습니다.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을 분열 국가로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외교로 독일이 통일국가로 성장하자 안보 위협을 느꼈습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더 성장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이센 역시 통일 독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반드시 압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은 1870년 결국 벌어졌습니다. 프로이센의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속전속결로 승리한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 지방을 얻고 바이에른을 포함한 남독일과 통일했습니다. 1871년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독일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한 독일제국의 탄생이었습니다.

 

베르사유궁 거울의 방 독일제국 선포
독일제국 선포

 

독일제국 국기
독일제국기

 

  • 비스마르크의 외교

독일제국을 건설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비스마르크는 더이상의 독일 팽창을 경계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외교력으로 독일 제국의 동남부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아군으로 만들고 대영제국과도 협상을 해 프랑스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습니다. 이로써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의 라이벌 프랑스를 독일제국 아래에 둘 수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탁월한 외교적 안목이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당대 유럽 강대국으로 평가받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랑스를 굴복시킨 독일제국은 주변 국가들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국의 경계는 독일제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은 팽창의지가 없음을 주변국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식민지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현상유지를 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독일제국의 태도에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안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제국의 든든한 우방으로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독일제국이 식민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 초기부터 프로이센은 해외 식민지를 확장해나갔고 비스마르크 시기인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를 분할하며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본인은 식민지 개척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 독일제국 아프리카 식민지
비스마르크 제위 시기 독일 식민지

 

  • 화학: 독일제국의 자산

19세기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 경제를 통해 국가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대영제국으로 대영제국은 인도를 비롯한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착취를 통해 매년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경제를 모델로 삼아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고 식민지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구성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경제를 통한 국가성장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이 식민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당대 인식으로는 옳지 않은 생각이었습니다. 독일제국은 마땅한 자원이 없는 국가였습니다. 19세기 중요 자원인 철광석과 석탄, 석유는 독일제국이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독일제국은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해 부족 자원을 충당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에게 식민지 확보는 필연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 패러다임을 전환시켰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부족한 자원을 화학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는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식민지 대신 화학으로"-오토 폰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지구 상에 남은 식민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식민지 확장은 주변국과의 충돌을 필연적으로 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식민지 확장에 들이는 돈을 국내 인프라와 산업에 투자하면 국가를 더 부강하게 만들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기초과학과 교육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에 무상교육을 실시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국민들을 인재로 양성했고 사회복지 법안과 예산을 통과해 복지시스템을 구성해 독일 국민들의 삶의 질을 대폭 향상시켰습니다. 국민 삶의 질 향상은 노동력의 증가로 이어졌고 산업 생산량은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자연과학 특히 화학에 대한 집중 투자는 1900년대 세계 노벨상의 30%를 독일인이 수상하게 되는 결과로 낳았고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에 있는 질소를 고체화하는 엄청난 혁신을 이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체화 된 질소는 비료와 화약의 재료로 이 기술이 개발되기 전 인류는 분뇨를 정제해서 고체 질소를 얻어야 했습니다. 기존 방식은 양질의 제품 대량생산이 불가능했지만 하버의 기술은 양질의 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버의 발명은 독일 농업 생산량과 군사력을 한층 높였습니다.

 

비스마르크 화학 질소공정 기술
질소공정 기술

비스마르크의 국민에 대한 투자는 국력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1871년 늦은 시기에 탄생한 독일제국은 빠르게 경제력 상승을 이루어냈습니다. 독일제국은 철강 생산량,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 산업분야에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며 유럽 최대 산업국가로 성장했습니다. 강력한 산업은 국력으로 직결했습니다. 독일제국의 국력은 빠른 속도로 대영제국을 제외한 유럽 열강들의 국력을 추월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을 빠른 시간 내에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대신 화학을 택한 그의 혁신적 아이디어는 바로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수많은 이들은 비스마르크 의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독일 국민과 정치인들은 독일 의회 주도 하에 민주주의 체제를 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카이저(황제) 통치 체제를 고집했습니다. 더불어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다른 이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독선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에 많은 독일인들은 분노했고 비스마르크는 결국 해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확장이라는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한 빌헬름 2세가 카이저로 등극하면서 독일의 행보는 180도 변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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