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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시작/강대국의 상황

[강대국의 상황: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 편] 세계를 양분한 제국

by 롱카이. 2021. 12. 29.

대항해시대 범선
대항해시대

 

  • 제국주의와 식민지 쟁탈전

15세기 바다를 통해 직접 인도로 가는 항해로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선두로 서유럽 국가들은 신항로를 개척해나갔습니다. 선두주자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는 남미를 중심으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들은 식민지의 자원을 수탈하며 국가의 부를 늘려갔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는 급속도로 부를 축적해갔고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자극을 받아 대항해시대에 뛰어들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존 식민제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공격해 이들을 쇠락에 이르게 하고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한 영국과 프랑스는 전세계로 진출하며 식민지를 확장해갔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확장해나갔고 이들은 확장 중 서로 충돌하며 라이벌 의식을 가졌습니다.

 

식민 쟁탈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본토에서 일언나 7년 전쟁에 참전하며 식민지 통치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유럽 본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하면서 동시에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정면 충돌을 일으켰고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이 승전하며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7년 전쟁 이후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도
7년 전쟁 이후 북아메리카 식민지

 

인도 영국 프랑스 식민지
1785년 인도 영국/프랑스 식민지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대영제국에게 많은 식민지를 주어야 했고 이은 프랑스 혁명으로 식민지 통치가 위태해졌습니다. 대영제국은 이를 놓치지 않고 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프랑스 식민지를 침탈했고 프랑스는 식민지 대다수를 잃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인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등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했고 식민지에서 얻는 자원은 제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산업혁명과 공장
세계의 역사를 바꾼 산업혁명

 

더불어 18세기 런던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생산량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방적기 덕에 목화 섬유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증기기관은 대량의 물자를 수송 가능하게 하는 철도를 개발하게 했습니다. 생산량은 극도로 증가했고 산업에 투자한 자본가들은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부를 얻고 힘을 키운 자본가들은 왕정 신분제에 대항해 새로운 질서를 외쳤습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탄생이었습니다.

 

급속도로 증가한 생산량은 제품들을 영국 내 신민들이 마음껏 사용하고도 남아돌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영제국은 대영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식민지에 고가의 가격으로 팔아 막대한 수입을 얻으며 부를 쌓았습니다. 이로 식민지에서 자원을 수탈하던 기존 식민지 경제에서 식민지 자원을 수탈하고 본토에서 생산한 제품을 식민지에 비싼 가격으로 되팔아버리는 식민지 경제로 변모했습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혁명 후 프랑스를 안정화시키고 영국을 따라 산업혁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영제국이 건립한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하며 제품을 되팔 식민지를 개척해나갔습니다.

 

19세기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식민지를 확장해나갔습니다. 

 

1900년 식민지 지도
1900년 식민지 제국 식민지

 

 

 

  • 경쟁자와의 대결

그레이트 게임 이란
그레이트 게임 [곰-러시아 제국 사자-대영제국]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은 전세계에 식민지를 확장하며 국력을 키워갔습니다. 특히 강력한 해군을 육성해 전세계 바다에 해군기지를 둔 대영제국은 전세계 바다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7년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대영제국과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식민제국은 패배를 인정했고 대영제국에 정면도전을 피했습니다. 그 대가로 프랑스 식민제국은 안전하게 식민지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 대영제국은 진정한 세계의 유일한 최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자리를 노리는 도전자가 등장했고 대양의 일인자 대영제국은 도전자의 도전장을 받아야 했습니다.

 

첫번째 도전자는 러시아 제국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제국의 원활한 운송과 세계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부동항을 얻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은 남쪽으로 진군하는 남하정책을 펼쳤습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지중해와 태평양, 인도와 인도양을 겨냥했습니다. 대영제국은 당시 세계 최강 육군을 자랑한 러시아 제국의 팽창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대영제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전 지역에서 막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를 Great Game으로 불렀습니다.

 

아프간 침공, 크림전쟁과 러일전쟁은 Great Game을 대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 아프간을 공격해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시도했고 크림전쟁으로 러시아가 보스푸르스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게 만들며 동양 제국주의 국가 일본을 지원해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았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을 얻지 못한 채 국력을 바닦냈고 Great Game은 대영제국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

대영제국 왕립 해군 관함식
1914년 대영제국 해군 관함식

세계를 주도한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 바로 코앞에 신흥대국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완전히 분열된 독일 땅에서 민족주의에 따라 게르만 통일국가 독일제국이 탄생했습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독일 땅에 통일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분열되어 있는 독일은 프랑스의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통일 독일은 프랑스를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을 분열상태로 두려 노력했지만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했습니다.

 

프랑스는 통일독일을 잠재 위험국가로 간주하고 독일이 성장하기 전 기세를 눌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역시 유럽의 강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고 프랑스를 압도한 독일은 프랑스에게서 독일제국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게서 얻었습니다.

 

프랑스 알자스 로렌
독일에게 뺏긴 알자스-로렌

알자스-로렌 지방은 프랑스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프랑스 철광석 생산량의 90%를 담당하는 지역으로 프랑스 철강생산량을 책임지는 지역이었습니다. 더불어 알자스-로렌 동쪽에 위치한 라인강은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를 나누는 천혜의 자연 방어시설이었습니다. 알자스-로렌지방을 독일에게 빼앗긴 프랑스는 파리로 진격할 독일을 막을 자연 구조물을 잃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진격을 막을 중요거점을 상실하고 독일의 위협에 더 노출되었습니다. 더불어 외교실패로 프랑스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습니다. 독일제국은 프랑스를 굴복시켰고 대영제국과의 대결을 준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 유럽 전함 수 그래프
20세기 초 유럽 국가 전함 수 비교 표

독일제국은 전세계로 팽창한다는 세계 정책을 기조로 삼고 노골적인 해군력 강화를 실시했습니다. 독일은 당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대영제국 해군의 70%를 따라잡을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해당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함선을 건함했고 대영제국에 이은 해군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독일의 해군력 강화는 대영제국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도 독일제국을 두려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고립되어있던 프랑스를 자기편으로 끌여들였고 대영제국도 이 대열에 참여해 독일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삼국협상이 탄생했습니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탄생한 삼국협상은 1905년과 1911년에 일어난 모로코 위기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독립국이었던 모로코 술탄국은 프랑스 식민제국과 스페인의 내정간섭에 시달렸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모로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세력확장을 막으려고 했던 독일제국은 모로코 술탄을 도와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독일에 반발하며 프랑스를 지지했습니다. 특히 영국은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독일제국은 힘을 쓰지 못했고 모로코는 프랑스령이 되었습니다.

 

 

 

  • Belle Époque[벨 에포크: 좋은 시대]

벨 에포크 그림
풍요와 평화의 시기 파리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종료된 이후 서유럽에는 오랜기간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발전한 기술과 고도 성장한 경제는 유럽에 번영과 평화를 이루어냈습니다. 벨 에포크 시기는 근심거리가 사라진 시기로 찬란한 미래와 평안이 깃들어 있는 시기였습니다. 안정과 평화는 경제, 예술, 문화의 발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패션, 미용, 문학, 건축이 이 시기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냈고 많은 사람들에게 꿈같은 시기로 기억되었습니다.

 

 

 

  • 점차 드리우는 식민지 제국주의 몰락의 징조

식민지 제국주의 만평
벨 에포크 풍자화

19세기 초까지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은 식민지 경제를 통해 국가의 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부를 얻은 자는 식민지 회사를 세운 자본가들(부르주아)였고 부는 본토 민중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본토 민중은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벨 에포크 시기는 부유한 부르주아가 독식한 시대로 식민지와 본토 민중의 희생을 부르주아가 독식하며 성장했습니다.

 

아프리카 식민화 지도
베를린 회담 전후 아프리카 식민지

1884년 베를린 회담으로 열강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면서 급속도로 넓어진 대륙에 식민지 인프라를 대규모로 투자해야 했습니다. 해안 지방을 중심통치하던 이전과 달리 내륙 깊숙히 인프라를 건설해야 했던 유럽 국가들은 철도건설비, 식민지인 교육 투자비, 군대 주둔비 등 막대한 예산을 식민지 건설에 투자해야 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비싼 식민지 건설비용을 대며 식민지를 뺏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본토의 민중에게 투자하는 예산은 없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식민지에 관심을 두고 본토인들을 내팽겨쳤습니다. 이에 본토 민중은 빈곤에 시달렸고 다음세대를 포기했습니다. 때문에 본토인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식민지 건설이 예전처럼 많은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적자가 늘어나며 사업은 점차 쇠퇴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쇠락하는 식민지 경제는 식민제국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의 국력 성장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편은 유럽을 공포로 떨게 만들었던 신흥 강자 독일제국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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