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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바꾼 것들/인민전쟁

[인민전쟁: 전쟁과 사람들] 전쟁 전의 낙관

by 롱카이. 2022. 5. 16.
  • 유럽의 발전과 애국주의

1900년 런던
1900년 런던

산업혁명 이후 유럽은 찬란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도시의 거리는 황금으로 눈부셨고 생활은 해가 갈수록 나아졌으며 사람들은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습니다. 발전하는 유럽 국가의 국민들은 놀라운 발전을 체감하며 자랑스러운 국가의 일원임을 뿌듯해 했습니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반응을 살피고 애국심을 자극해 국민들이 국가에 충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교육을 실시해 국가의 자부심을 교육했고 국민들은 자랑스러운 고국을 위해 목숨바칠 준비가 되어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는 19세기 중순 유럽 국가끼리 전쟁의 전운이 감돌 때 더 부각되었고 국가는 정치적 위기에 빠질 때마다 애국주의를 외쳤고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은 이에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국가는 전쟁을 명예로운 모험으로 포장했고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은 중세 기사들처럼 신성한 의무라고 설파했습니다. 전쟁터의 군인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지만 국가는 이미 국민들을 애국주의로 무장시켰고 이들이 바라본 현실은 국민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 독일제국 군국주의

독일제국의 군국주의
독일제국의 군국주의

유럽의 국가들은 국민의 눈과 귀를 닫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세뇌했습니다. 이는 군국주의를 택핸 프로이센 왕국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19세기 중순 게르만 국가들을 통일해야 하는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랑스 제국을 적으로 인식했고 아직 작은 국가인 프로이센 왕국이 강대국인 두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효율적인 체제를 택했습니다. 그것은 군국주의로 군사력을 국가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전쟁과 전쟁준비를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이념이었습니다. 군국주의 하에서 국가 역량은 군대 양성을 위해 투입되었고 프로이센 왕국은 짧은 시기에 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군국주의로 성장한 군사력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사용해 프로이센 왕국의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의 국민들은 믿을 수 없는 승리에 환호했고 독일제국 선포와 함께 두 전쟁의 승리를 게르만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겼습니다. 프로이센 왕국 시절의 군국주의는 독일제국 건국 이후로도 유지되어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세계정책을 펼칠 때 독일제국 신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활발하게 사용되었습니다.

 

 

 

  • 애국심에 눈이 먼 지도자들

총력전의 시초를 보여준 미국 남북전쟁
총력전의 시초를 보여준 미국 남북전쟁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은 지지율을 올려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 발전을 위해 대중들에게 애국심을 주입하며 선동했습니다. 문제는 지도자들마저 애국주의에 경도되어 현실을 냉철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전쟁을 부르짖었는데 19세기만 해도 전쟁 후 얻는 배상금으로 경제발전을 할 수 있어 지도자들에게 전쟁은 구미가 당기는 정치활동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과 유럽이 참전한 전쟁은 길게는 2년 안에 끝나는 단기전으로 끝났고 전쟁은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국가의 역량을 널리 알리는 훌륭한 홍보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도자들은 점차 국가의 이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전쟁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 무기와 인프라는 발전해갔고 전쟁은 새로운 패러다음으로 전환되고 있었습니다. 그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이 1861년 시작되어 1865년 종결된 미국 남북전쟁으로 미국 남북전쟁은 총력전의 개념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쟁은 더이상 이득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국토와 인프라가 심각하게 파괴되어 전후 복구의 늪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4년부터 1905년간 벌어진 러일전쟁은 소모전의 시초를 보여주었습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강력한 방어망에 수많은 군인을 소모해가며 전쟁을 벌였고 승기를 잡음에도 막대한 소모전으로 인한 부채로 국력이 쇠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유럽 국가의 지도자들은 남북전쟁과 러일전쟁의 경고를 무시했고 그 대가는 어마어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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