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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바꾼 것들/인민전쟁

[인민전쟁: 전쟁 후 사회] 많은 것이 바뀌다

by 롱카이. 2022. 5. 19.
  • 여성투표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참전국의 모든 사람이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남성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갔고 여성은 사회에서 남성의 빈자리를 채우고 간호사를 자원해 전쟁터의 부상병들을 치료했습니다. 모든 것이 총동원 되던 전쟁 와중 여성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참전국의 사회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고 여성은 사회를 지탱하는 엄청난 수고를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참전국의 지도자들은 여성의 사회 참여 노력을 인정해 여성들에게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선거권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큰 권리였습니다. 대전쟁 전 뉴질랜드와 핀란드 대공국이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전쟁 이후 여성들의 사회 활동 능력을 확인한 지도자들은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했습니다.

 

독일제국 여성투표권 홍보 포스터
독일제국 여성투표권 홍보 포스터

캐나다 자치령은 1917년 퀘벡 주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징집 반대 시위를 열자 징병제를 통과하기 위해 여성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었습니다. 이후 캐나다 자치령 정부는 전쟁 기간동안 여성들의 사회활동 확대와 여성 투표권 운동에 1917년 이후로도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었고 이후 여성 선거권을 법으로 통과해 인정했습니다.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이후 등장한 러시아 임시정부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어 전쟁에서 활약한 여성들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러시아 임시정부에 여성투표권이 자리잡자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가 분열되어 수많은 국가들이 탄생할 때 그 신생 국가들은 러시아 임시정부의 여성투표권을 그대로 받아들여 여성투표권을 인정했습니다. 폴란드 제1공화국은 1918년 여성투표권을 인정했고 독일제국도 1918년 여성투표권을 인정했습니다.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1919년 등장한 헝가리 의회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여성투표권을 초대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여성투표권은 동유럽과 중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북유럽의 스웨덴 왕국은 여성투표권이 인정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18년 여성투표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서유럽은 아직 여성투표권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미국 여성투표권
미국 여성투표권

허나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대전쟁 기간동안 여성들이 수행한 역할을 설명하며 참정권을 요구했습니다. 여성들은 여성투표권 운동을 벌였고 대영제국은 1917년 부분적으로 여성투표권을 인정하다 1919년 여성운동에 따라 여성투표권을 완전히 인정했습니다. 아일랜드 자유국 역시 1919년 여성에게 부분투표권을 인정하다 1922년 완전투표권을 인정했습니다. 미국은 스페인 독감으로 여성운동이 위축되었다 스페인 독감이 거의 사라진 1920년 활발한 여성운동이 벌어졌고 당해 여성투표권이 인정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1919년 샤를로트 대공 주도 하에 여성투표권이 인정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왕국은 그보다 더 이른 1917년 여성투표권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 포르투갈 공화국은 여전히 여성투표권에 부정적이었고 여성투표권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사회복지의 확대

셸 쇼크를 겪는 영국원정군 병사
셸 쇼크를 겪는 영국원정군 병사

한편 남성들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활동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남성들의 수는 적었고 살아돌아온 이들도 신체 일부를 다친 부상병이거나 대부분 전쟁의 참혹한 현실에 충격을 받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전쟁 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시민들과 정부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은 사람들이 대거 발생하자 이들을 치료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대영제국의 심리학자 찰스 사무엘 마이어스는 영국원정군 병사들과 장교의 스트레스 장해를 분석해 셸 쇼크Shell Shock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대영제국 시민들에게 그 개념을 널리 알렸습니다. 덕분에 후방의 민간인들도 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병사에게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 인지했고 정치인들은 셸 쇼크를 겪는 병사들을 위한 사회복제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독일사민당 로고
독일사민당 로고

대영제국도 전후 사회복지에 힘썼지만 전후 사회복지 제도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장 먼저, 가장 정교하게 확립했습니다. 독일제국이 해체되고 정권을 잡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사민당은 사회복지를 외쳤고 병사들과 민간인 모두를 통용하는 사회복지제도 정립을 추진했습니다. 독일사민당의 주도 하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위로하고 사회에 전반적인 복지를 확대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제3공화국과 벨기에 왕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완전히 짓밟으려고 시도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멸망 직전까지 갔고 독일사민당은 사회복지를 완성하기도 전에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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