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양 양측의 신흥강대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합중국과 일본 제국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특히 일본제국은 독일령 뉴기니의 제도를 점령해 남양군도南洋群島를 획득했습니다. 이로서 태평양은 필리핀-괌-하와이를 점령한 미합중국과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점령한 일본제국, 영국령 오세아니아 연방과 뉴질랜드 자치령이 삼분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연방과 뉴질랜드 자치령은 대영제국으로부터 막 자치권을 얻고 군사권을 받은 신생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연방과 뉴질랜드 자치령은 미합중국과 일본제국에게 해군력으로 밀렸습니다. 고로 실질적인 태평양의 지배자는 미합중국과 일본제국이었습니다. 둘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태평양의 패권을 둔 대결을 준비했습니다.
- 일본제국의 호전적 팽창정책
일본제국은 19세기 말 막 근대화에 성공해 20세기 초에 제국주의 팽창을 한 국가로서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모든 면이 늦었습니다. 또한 일본제국은 본토에 자원이 부족한 국가였고 일본제국의 성장을 위해서는 중국의 자원과 인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은 중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당초 국가 목표로 삼았습니다. 일본제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전 후 중국을 포위하는 교두보를 집중적으로 획득했습니다. 중국 본토 앞에 있는 류큐琉球, 타이완臺灣, 조선朝鮮을 점령했고 중화민국 랴오둥遼東의 다롄大連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서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통해 만주로 진출한 후 베이징北京으로 침략하는 진출로를 확보했습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제국은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 러시아 제국이 차지하던 만주 철도로를 점령해 만주 침공로를 확보했습니다. 이어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점령해 미합중국이 중국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중국 바로 아래에 있는 미국령 필리핀이라는 변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제국은 자오저우만 조차지를 점령해 칭다오靑島-베이징北京 철로의 입구를 점령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제국의 식민지 확장은 노골적으로 중국 대륙 점령을 목표로 했습니다. 미합중국은 이를 지켜보고 일본제국의 팽창을 두려워했습니다.
- 미합중국의 두려움
제1차 세계대전은 미합중국이 군사적으로 성장한 전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합중국은 미국원정군으로 유럽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1917년 미해군은 더 강한 해군력을 원해 미국 정부에 건함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전함 건함 승인이 완료되기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미국 정부는 예정보다 절반의 건함을 승인했습니다. 미합중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또다른 갈등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국의 눈치를 보며 건함 수를 줄였지만 주변국은 미해군 전함 수 증가에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미합중국이 대영제국을 능가하면서 대영제국과 미합중국 간에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대영제국은 세계 1위 국가 자리를 지키고 싶어했고 아직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했습니다. 또한 일본제국은 안정적인 중국침략을 위해 태평양에 해군 방위선을 지키려고 했고 더 많은 전함을 건조해 강한 해군력을 보유하려고 했습니다. 미합중국이 두려워한 것은 영일동맹을 맺은 대영제국과 일본제국이 힘을 합쳐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미합중국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전세계가 해군 군축을 해 자국의 안보를 지키자고 했습니다.
- 미합중국의 군비축소 조약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부터 미합중국과 일본제국은 해군력 강화에 국력을 소모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두 국가는 막대한 해군력 강화비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해군력 군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미합중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21년 11월 12일 워싱턴 회담을 열어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왕국, 네덜란드 왕국, 포르투갈 제1공화국, 중화민국, 일본제국을 초대한 후 군비제한에 대해 논의하고 전후 급변한 동아시아에 새질서를 확립했습니다. 또한 1921년 11월 11일 미합중국,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제국과 함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해 각 국의 전함 수를 제한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미합중국과 대영제국은 50만톤, 일본제국은 30만톤,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17만톤으로 전함 배수량을 제한했고 항공모함의 경우 미합중국과 대영제국은 13만 5000톤, 일본제국은 8만 1000톤,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6만톤으로 제한했습니다.
- 이어진 해군 군축 조약
미합중국은 1922년 체결된 워싱턴 군축 조약의 맹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력 전투함선이었던 전함과 항공모함의 배수량만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워싱턴 군축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은 순양함과 구축함, 잠수함을 무제한 건함하면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해군력을 증강했습니다. 반면 미합중국은 정직하게 주력 전투함선과 보조 전투함선을 모두 군축했습니다. 홀로 불리해진 미합중국은 대영제국, 일본제국을 초대해 1927년 6월 20일 제네바 해군 군축 조약을 열었습니다. 미합중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과 동일하게 보조 전투함선의 비율을 미합중국:대영제국:일본제국 = 5:5:3으로 정하려고 했지만 전세계에 해군을 파병한 대영제국은 보조 전투함선 수 마저 군축한다면 세계 해상 패권을 잃을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에서 미합중국의 주장에 항시 반대를 했고 제네바 해군 군축 회담은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포기하지 않고 1930년 4월 22일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을 열었습니다. 이 회담은 미합중국,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제국이 참여했습니다.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은 각국의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의 배수량을 지정했습니다. 참여국은 모두 런던 해군 군축 회담 내용에 서명했고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런던 해군 군축조약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지중해에서 해상 패권을 원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보조 전투함선의 배수량까지 제한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며 보조 전투함선 배수량을 지키지 않고 이탈했습니다. 이어 미합중국과 대영제국 역시 순양함 수가 너무 부족하다 생각해 조약을 자체적으로 어겼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제국이 가장 민감하게 나섰습니다. 일본제국의 하마구치 내각은 해군력 증강으로 국가 재정이 소모되는 것을 막고 방만한 재정을 정리하기 위해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적극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제국 해군 장성을 비롯한 함대파는 내각의 결정에 불만을 표했고 내각에 찬성한 조약파와 함대파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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