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쟁 이후 유럽의 경제
제1차 세계대전은 중부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참전한 유럽 국가들은 대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궁핍해졌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벨기에 왕국,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 등 국토가 전쟁터가 된 국가들은 농지와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심각한 경제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불가리아 차르국은 전쟁 배상금을 갚아야 했습니다. 이에 불가리아 차르국은 전쟁 배상금의 일부를 선납하고 영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배상금 문제에서 빠져나갔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꼼짝없이 전쟁 배상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들은 국가 분열되면서 각 국의 운명으로 넘어갔습니다.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은 농업에 의존했던 만큼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체히Čechy(보헤미아)에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업지대가 있었기에 산업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머저르 왕국은 공업지대를 모두 잃고 경제침체에 들어섰습니다. 다행히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경제협력을 해 금융업으로 국가를 지탱했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은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했고 대영제국은 국고가 빈 상태에서 채권을 갚아내느라 빚에 허덕였습니다. 대전쟁 이후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은 국가는 스웨덴 왕국, 덴마크 왕국, 노르웨이 왕국 중립국을 유지한 북유럽 국가였습니다. 네덜란드 왕국은 중립국이었지만 독일제국과 대영제국의 북해 해전으로 무역로가 가로막혀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전후 유럽 경제는 침체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 금본위제 복귀 노력
19세기 대영제국은 전세계를 지배한 패권국가로 런던London은 전세계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대영제국 정부는 금본위제를 채택했고 파운드 당 금으로 환율을 고정해 지폐 소지자가 언제든지 금으로 바꿀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대영제국은 금 1온스 당 4.25 파운드로 단위를 고정했고 금 1온스 당 세계 각국의 화폐가치를 고정했습니다. 이로서 대영제국 정부는 전세계에 파운드로 화폐 거래를 했고 런던London 은행에 막대한 양의 금을 보유했습니다. 대영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했고 대영제국은 금으로 세계 경제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대전쟁으로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대영제국은 예상보다 더 길게 이어진 대전쟁에 전쟁자금을 급히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 정부는 막대한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일단 금본위제를 무시하고 파운드화 화폐를 인쇄했습니다. 때문에 대영제국 파운드화 가치는 1온스당 화폐가치가 감소했습니다. 나중에는 화폐도 부족해 미합중국에 금을 주고 식량과 전쟁물자, 생필품을 구입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의 금이 미국 뉴욕New York으로 이동했고 전후 미국의 금 보유량은 전세계 금의 40%를 보유했습니다. 때문에 미국 달러 가치는 상승했고 유럽 국가들은 전쟁 자금을 위해 마련한 막대한 화폐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1918년 전후 대영제국 경제관료들은 대영제국의 위상을 되찾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 뉴욕New York 은행에 있는 금을 런던London 은행으로 되찾아올 방법을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했습니다. 허나 대영제국은 당장 금이 없었고 파운드화는 넘쳐났기 때문에 금 1온스 당 파운드화 비율을 몇으로 유지하느냐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자유변동환율을 채택했고 미합중국은 대영제국의 복귀를 위해 이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다른 유럽 승전국들도 대영제국을 따라 금본위제로 복귀했지만 그들도 금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일부러 프랑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보유한 파운드화를 매도해 대영제국으로 간 금을 모조리 구매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대영제국에 막대한 양의 금을 돌려주면서 대영제국을 살려냈고 유럽 국가들은 보유 파운드화로 금을 구매해 각각 금본위제로 복귀했습니다. 미합중국은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금을 유출했지만 유럽 경제를 살려내는 성과를 보였고 미국의 금 보유량이 떨어져도 주식은 계속 오르는 유토피아 상황이었기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된 미합중국
유럽 국가들이 금을 받아내며 차츰 경제성장을 하는 동안 미국의 경제는 고공행진했습니다. 모든 종목의 주식은 멈출 줄 모르는 상승세를 기록했고 미국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를 맞이했습니다. 더불어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승전국에게 막대한 차관을 빌려 그 빚을 받아낼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고 유럽 경제를 살린 일등공신이기에 유럽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또한 미국은 유럽에 많은 양의 금을 돌려줘도 여전히 세계에서 금 보유량이 가장 많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은 대영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대영제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 탈환을 꾀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허나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음에도 먼로 독트린을 고집하며 고립주의를 고수했고 세계경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경제는 점차 침체에 빠졌습니다.
- 위기의 세계 경제
유럽 국가들은 금본위제로 복귀에 성공했지만 자유변동환율로 금 환율을 정했기 때문에 자국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은 대전쟁 이전 시기로 돌아가고자 무리하게 통화가치를 높여 파운드화가 과대평가되었고 고평가된 통화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펼쳤습니다. 대영제국의 이자율은 치솟고 대영제국의 생산품의 가격은 높은 가격을 기록했습니다. 불행히 대영제국의 생산품은 미합중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품보다 품질은 떨어지면서 가격은 높아 시장에서 외면받았고 대영제국 수출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출이 되지 않자 공장들은 문을 닫고 실업률은 최고률을 찍었습니다. 이어 전쟁 배상금을 갚아야 하는 패전국들은 금본위제 복귀하면서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도저히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등 승전국도 전쟁 배상금을 받지 못해 경제회복에 실패하면서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경제성장이 멈췄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하지 못하자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부터 타격을 받았습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에 예속된 식민지들은 유럽의 산업이 멈추자 식민지로 가는 자본이 사라졌고 식민지인들은 적은 자본을 어떻게든 아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927년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에 경제위축이 일어났고 이어 1928년 캐나다 자치령에도 불황이 찾아왔습니다. 식민지 뿐만 아니라 산업력이 약해 농업으로 수출입에 의존하던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동유럽 신생 국가들도 소비국인 유럽의 불황에 같이 경제가 휘청였습니다. 이는 도미노처럼 이어져 유럽 본국의 증시마저 하락했습니다. 세계 경제가 디플레이션으로 가던 와중 유일하게 증시가 고공행진하는 국가는 미국이었습니다.
- 대공황
미국은 홀로 성장 신화를 찍고 있었습니다. 미국 증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행진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빚을 내 투자했습니다. 은행들은 무조건으로 사람들에게 주식을 판매했고 사람들은 기업에 막대한 양의 주식 투자를 했으며 기업들은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생산물은 증가하더나 1929년 공급이 수요를 넘어섰습니다. 또한 미국 농촌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금주법의 타격을 받아 몰락했고 식량 생산량은 감소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 기업들은 생산을 줄여야 하지만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은 더 많은 투자금 유치를 위해 더 많이 생산했습니다. 때문에 미국 기업의 주식 거품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려했던 거품이 터졌습니다. 미국 주식에 투자한 해외 주식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투자금을 매도해 팔아넘겼고 해외 주식 투자자들의 행보에 불안해진 미국인들이 주식을 대거 팔아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다우존스 지수는 급락했고 이후 바닦으로 끊임없이 추락했습니다. 대공황의 시작이었습니다.
- 재앙이 세계를 덮치다
하루아침에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자 미국인들은 남은 금액이라도 회수하려고 은행에 줄을 섰습니다. 은행은 보유 화폐보다 더 많은 투자금을 돌려주다 줄파산했고 늦은 사람들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렸습니다. 또한 은행이 줄파산하면서 달러 통화 가치가 35% 이하로 감소했고 가격도 맞춰 하락했습니다. 그러자 기업들은 생산원가를 맞추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도시 사람들은 은행이 망해 돈을 잃고 직장에서 해고당해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잃고 길거리에 앉았습니다. 길거리로 내몰린 시민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경제 개입을 요구했지만 미국 대통령은 국가의 경제개입은 공산주의나 하는 일이라며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전체 인구의 25%가 실업자가 되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당황하며 긴급히 경제에 개입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미국발 대공황은 바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덮쳤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크레디트안쉬탈트 은행에서 대출을 회수할 것을 요구했고 프랑스 은행들은 정부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그 소식이 오스트리아를 덮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뱅크런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1931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크레디트안쉬탈트 은행이 파산했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동유럽 국가의 은행이 줄도산할 뻔했습니다. 다행히 로스차일드 가문이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에 자금을 지원해 크레디트안쉬탈트 은행이 죽다살아났습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동유럽 국가들은 금본위제를 고수하기 위해 외국환 거래를 강하게 규제하며 나라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자 그 폭탄은 외채가 많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향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나서 얼마 안가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이 파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은행은 중앙은행인 제국은행에 도움을 청했고 제국은행은 은행들을 구제하느라 자산이 바닦났습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1년 7월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미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모라토리엄을 선포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쟁 배상금을 일시정지시켰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모라토리엄으로 외채 동결을 했고 대영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파운드 자산이 동결되어 돈을 날렸습니다. 이에 세계의 금융지 역할을 하던 대영제국은 신생독립국과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가 세계적인 대침체로 함께 몰락했습니다. 결국 대영제국은 참고 견디다 못해 1931년 9월 금본위제를 포기했습니다. 이는 다시 미국 은행을 강타해 미국 은행이 줄파산하며 은행공황 사태를 일으켰고 세계 경제는 다함께 추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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