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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전체주의 등장] 대공황이 만든 전체주의

by 롱카이. 2022. 12. 7.
  • 바이마르 공화국에 등장한 혜성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바이마르 공화국은 초인플레이션을 순식간에 잡았지만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한 무능한 정부라는 오명을 벗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독일인들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를 불신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주의 정책에 거부감을 표했습니다. 그 틈을 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빠르게 일약스타로 등극했습니다. 1923년 11월 8일 뮌헨 폭동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는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대통령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당해 독일 총선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대표인 아돌프 히틀러를 견제하기 위해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했지만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노력으로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후 1933년 3월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1933년 3월 24일 수권법을 제정해 독재 체제를 열고 독일국을 건국했습니다.

히틀러 주도의 독일국 경제성장
히틀러 주도의 독일국 경제성장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타 정당과 경쟁 정치인들을 제거해 정권을 장악한 후 위대한 게르만국을 재건하겠다며 민중을 선동하고 대공황 해결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임급교섭을 정부가 직접 관리했습니다. 또한 외환통제로 국가 재정을 통제한 후 국가 주도 산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기업의 증권을 직접 매수하고 인허가 투자 방식으로 바꿔 기업 재정을 국가 재정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저임금을 유지해 기업들이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 국가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막 등장한 독일국은 순식간에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이 두려워했던 독일국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국을 순식간에 강대국으로 만든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 주도의 전체주의를 실시한 독일국이 탄생했습니다.


  • 회복에 실패한 이탈리아 왕국
베니토 무솔리니 선전화
베니토 무솔리니 선전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국보다 먼저 전체주의를 실시한 국가는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였습니다. 국가 파시스트당이 이탈리아 왕국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 주도 하에 이탈리아 왕국이 움직였습니다. 1931년 대영제국이 보호무역을 자청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과 함께 금블록에 속한 이탈리아 왕국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민족 자긍심이 높았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리라화를 평가절상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동결하면서 리라화 평가절상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상승하자 임금을 올리는 대신 외환을 통제하고 청산작업을 시행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왕국의 식량자급을 위해 식량 가격을 높게 책정해 이탈리아 왕국 농가를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허나 모두들 통화가치를 평가절하는 와중에 홀로 평가절상을 한 이탈리아 왕국은 대공황의 여파를 그대로 맞이했고 이탈리아 왕국의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이에 베니토 무솔리니는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침략전쟁으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해 군비를 증강시켰습니다.


  • 일본제국 폭주의 조짐
만주사변
만주사변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대영제국을 따라 금본위제를 일시 포기했습니다. 전후 일본제국은 금본위제로 복귀를 꾀했으나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으로 수많은 인명 재산피해를 내 이를 복구하느라 재정을 소모했고 1927년 타이완 은행발 경제위기가 닥쳐 금본위제 복귀에 실패했습니다. 이후 1931년 금본위제를 겨우 부활시켰는데 이 때 미국발 대공황이 아시아를 덮쳤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 정부는 1931년 12월 빠르게 금본위제를 취소해 대공황의 충격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안 보았을 뿐 일본제국은 유럽 국가들이 경제블록을 건설하면서 수출길이 막혀 경제적 피해를 보았습니다. 낮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던 일본제국의 수많은 기업들은 제품을 수출하지 못해 줄도산하면서 일본제국에도 경제혼란이 찾아왔습니다. 거기에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 관동군의 독단행위로 시작된 만주사변을 일본제국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고 관동군에게 끌려다니면서 국내외적인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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