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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대공황 이후] 각국의 회복 노력

by 롱카이. 2022. 12. 7.
  • 미국의 뉴딜정책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대공황에서 겨우 생존한 은행들도 1931년 은행타격으로 줄파산하자 미국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습니다. 바닦이라고 생각한 곳 아래에 더 깊은 바닦이 있었고 미국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전 미국 경제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결국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책임을 물어 사임했고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가 취임했습니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는 미국 대침체를 어떻게든 막으려고 해외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해외 미국 자본을 유입할 것을 명했고 전세계의 미국 자본들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차관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바이마르 공화국은 대침체 상황에서 8억 금마르크를 도로 빼앗겼습니다. 미국은 해외 자국 자본을 흡수한 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달러화를 평가절하했습니다. 그 결과 해외국들이 금으로 달러화를 구매했고 미국 통화량이 증가했습니다. 덕분에 금리가 감소하고 내수시장과 투자가 서서히 회복했습니다.

뉴딜 정책
뉴딜 정책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뿐만 아니라 뉴딜 정책도 밀어붙였습니다. 먼저 은행에 개혁을 감행했는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해 예적금과 투자금을 분리하고 예금보험을 제정해 상업은행의 고객들을 보호했습니다. 또한 산업부흥법과 농업부흥법을 통과시켜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했습니다. 정부는 대기업을 적극 지원하고 농산물 가격을 50% 인상했습니다. 덕분에 대기업과 농가는 혜택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정부의 명령 하에 폭발적인 고용을 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강성해졌습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실질임금이 증가하면서 기업과 대규모 농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해고했고 실업률은 최저점을 찍다 다시 높아졌습니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구호정책으로 빈민층을 구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미국 정부 재정으로 대규모 공익사업을 추진해 빈민들을 대규모 채용했습니다. 하루벌이가 없던 빈민들은 국가 세금을 받아 자금을 마련했고 많은 이들이 절대 빈곤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국가 재정을 악화시켜 미국 경제성장을 둔화시켰지만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했고 미국 경제는 다시 회복세를 노렸습니다. 허나 뉴딜정책은 극심한 미국 재정 악화를 겪으며 한계에 부딫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를 해결할 마땅한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대영제국의 보호무역
1920년대 대영제국
1920년대 대영제국

대공황이 오기 전인 1928년 대영제국은 이미 높은 환율과 낮은 생산품질로 수출에서 큰 타격을 받고 기록적인 실업률을 기록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대공황이 오자 대영제국 경제는 붕괴 직전으로 갔습니다. 결국 금본위제를 고집하던 대영제국 정부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했습니다. 또한 해외 수입품에 관세를 메기면서 대영제국이 19세기 주도했던 자유무역을 스스로 내팽개쳤습니다. 19세기 무관세 자유무역을 주도하던 대영제국은 세계의 무역을 주도했지만 전후 대영제국은 그럴 여력이 없었고 높은 관세를 메기며 보호무역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에 대항해 다른 국가들도 대영제국에 관세를 메기며 무역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대영제국은 식민지 경제 블록끼리만 무역하는 식민지 블록 경제를 실행했고 값비싸고 품질이 낮은 대영제국 제품을 식민지에 강매하면서 어떻게든 경제회복을 꾀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대영제국은 식민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식민지에 높은 자치권을 보장했습니다. 1931년 12월 11일 대영제국은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발표해 아일랜드 자유국, 캐나다 자치령, 뉴펀들랜드 자치령, 남아프리카 연방,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뉴질랜드 자치령에 주권을 받을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캐나다 자치령과 남아프리카 연방,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주권을 받아 주권국가로 독립했습니다. 이어 대영제국의 지배에 거세게 반발한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을 1932년 10월 3일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시켜 달래준 뒤 대영제국 제품을 구매하는 경제블록으로 편입시켰습니다. 대영제국은 식민지, 특히 영국령 인도제국의 자원을 수탈하고 강매를 하면서 근근히 버텨나갔습니다.


  • 프랑스 제3공화국의 실패한 정책
1934년 파리 폭동
1934년 파리 폭동

프랑스 제3공화국은 대전쟁으로 국가 산업기반을 상당히 잃은 상태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쟁 배상금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이 모라토리움을 선포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미리 수집해둔 금으로 버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 제3공화국은 상당 수의 금을 보유하면서 프랑화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세계시장에서 프랑화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프랑스 제3공화국은 낮은 프랑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고수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들만 금본위제를 따라잡으느라 허덕였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제3공화국은 대공황이 세계를 휩쓴 1929년과 1930년 무사했습니다. 허나 1931년 대영제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금본위제를 포기해 자국 화폐를 평가절하하자 프랑스 프랑화는 홀로 금본위제를 고수하게 되었고 프랑화 가치가 급증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제3공화국도 과대평가된 자국 화폐의 공격을 받았고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프랑화를 평가절하했습니다. 허나 때는 이미 늦었고 프랑스 제3공화국은 경제 침체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에 분노했고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제3공화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 현명하게 대처한 스웨덴 왕국
스웨덴 왕국의 주력산업 철도산업
스웨덴 왕국의 주력산업 철도산업

스웨덴 왕국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제국에 군수물자를 판매하며 소소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또한 스웨덴 왕국은 미국에 부채를 지지 않았으므로 전후 미국 부채 상환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스웨덴 왕국은 전쟁 당시 금본위제를 포기했지만 전후 다른 참전국들이 변동환율정책으로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려고 할 때 스웨덴 왕국은 고정환율을 고집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스웨덴 왕국 기업들이 고정환율에 피해를 보았고 1922년 사회민주당이 스웨덴 왕국의 여당이 되었습니다. 노동자 친화적이었던 스웨덴 왕국 사회민주당은 대기업 중심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펼쳐나갔고 1931년 미국발 대공황이 유럽을 흔들자 재빨리 금본위제에서 벗어난 후 급진적인 통화팽창 정책을 펼치며 철도산업 등 다양한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대공황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경제 약소국
대공황 상황 속 미국의 경제지원을 환영하는 멕시코인
대공황 상황 속 미국의 경제지원을 환영하는 멕시코인

동유럽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편성된 질서를 주도하고자 전쟁을 벌였습니다. 신생국들은 공산주의 적군의 침공에 맞써 싸우며 민족 영토를 두고 사방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국가 재정은 바닦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더불어 동유럽 국가들은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잔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은행에 종속되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크레디트안쉬탈트 은행이 파산하자 국가 은행이 줄줄이 파산했고 남은 은행을 살리기 위해 해외 자본을 동결시키고 무역을 중단했습니다. 이는 당장 살기 위해 한 행위였지만 외부 교역을 하지 못해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유럽 국가들은 나라 문을 잠근 체 내부에서 침체를 겪었습니다. 네덜란드 왕국과 그리스 왕국은 금본위제를 늦게 포기한 결과 막대한 손실을 겪고 경기 침체에 빠졌습니다. 농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소비국인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서로 관세를 부과하며 보호무역에 나서자 식량 수출가격이 폭등해 식량을 수출하지 못하고 이득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산업이 발달하지 않아 생필품을 필수로 구입해야 했고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수출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고가의 수입품을 구매해 국가 재정에 심각한 적자가 발생했습니다. 설상가상 남아메리카 해외 자본의 대다수를 차지한 미국 자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 하에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해외 자본마저 빠져나갔고 남아메리카의 경제 침체가 가속화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어느 정도 경제를 회복한 후 남아메리카에 재정지원을 해 남아메리카에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태동하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 은본위제를 시행한 중화민국
중화민국 은전
중화민국 은전

세계 국가들이 금본위제로 경제를 굴리는 동안 중화민국은 은본위제를 고수했습니다. 중화민국은 은전으로 거래를 하며 국고에 은전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은으로 미국과 교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변동환율제로 금본위제 복귀를 시도하다 대공황을 맞이한 것과 달리 중화민국은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성장한 중화민국은 중국공산당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공산당 탄압에 국력을 소모했습니다. 그럼에도 중화민국의 경제는 성장했지만 1935년 미국이 중국의 은화를 대량 회수하자 중화민국은 바로 은본위제를 포기했습니다. 이후 도로와 철도 등 국가 주도 산업으로 중화민국 경제를 어떻게든 살려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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