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르비아 공국
18세기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민족들을 2등 신민으로 규정하고 직접통치했습니다. 오스만 치하의 발칸 슬라브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가졌지만 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봉기를 일으킬만한 뚜렷한 구심점이 없어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허나 18세기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 러시아 제국은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 민족들 해방을 표창하며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수차례의 침공에 대패하며 물러났고 전쟁으로 국고도 탕진해 경제불황에 직면했습니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세금을 인상해 국고를 빠르게 채우려고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들은 세금 인상에 반발했고 발칸 반도 서부의 세르비아 민족 역시 오스만 제국의 정책에 반발했습니다. 더불어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퍼진 범슬라브주의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인들에게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뭉쳐 슬라브 국가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세르비아인들은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게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1804년 세르비아 혁명정부를 건립했고 농민 출신이었던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1813년 제1차 세르비아 봉기를 일으켰고 1815년 제2차 세르비아 봉기를 일으켜 오스만 제국에게 강한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를 세르비아 공국으로 승격시켰고 봉기를 주도한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놓인 국가였지만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세르비아 공국은 대체로 오브레노비치 가문이 통치했고 세르비아 공국 제5대 공작 밀란 1세는 1882년 세르비아 왕국을 건국하고 국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 단결 혹은 죽음Уједињење или смрт
세르비아 왕국의 초대국왕 밀란 1세의 뒤를 이어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제2대 국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은 세르비아 왕족 혈통을 잇기 위해 결혼을 해야 했는데 세르비아 신민들과 귀족들은 국왕이 강대국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국왕은 자신의 어머니의 시녀인 드라가 마신과의 결혼을 고집했습니다. 드라가 마신은 출생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문란한 사생활은 전국에 유명했고 세르비아의 모든 사람들은 문란한 여자와 결혼을 결사 반대했습니다. 허나 사랑에 눈이 먼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은 아버지인 선대 국왕을 추방시켜가면서 그녀와 결혼했고 그녀의 형제를 후대 국왕으로 임명하면서 세르비아 전국은 뒤집어졌습니다. 세르비아 신민들이 반발하자 국왕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민중을 탄압했고 세르비아 민중은 국왕과 왕가에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가졌습니다.
왕실 논란으로 세르비아 전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세르비아 왕국의 육군 장교들은 1901 5월 9일년 비밀 결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단체는 흑수단Црна рука이었습니다.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세르비아 왕실 전복을 목표로 만들어진 단체로 국왕과 왕비 암살을 담당했습니다.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1903년 5월 28일 밤,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로 하여금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Београд의 고궁을 습격해 고궁의 사람들을 학살하게 명했습니다. 세르비아 국왕 부부는 고궁의 비밀통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통로 입구가 옷장에 막혀 있었고 별 수 없이 옷장 안에 숨어있다 흑수단Црна рука 단원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세르비아 민중은 국왕 부부의 죽음에 기뻐했고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애국자로 추양받았습니다.
흑수단은 대가 끊긴 오브레노비치 가문 대신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를 국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로서 세르비아 왕국에 제3대 국왕 페타르 1세가 등극했습니다. 세르비아 민중들은 새 국왕과 새 질서에 환호했고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세르비아 왕국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허나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군사단체의 왕실 전복 쿠데타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고 페타르 1세에게 흑수단Црна рука을 탄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약소국이었던 세르비아 왕국의 국왕 페타르 1세는 강대국의 요구를 수용하고 흑수단Црна рука을 탄압했지만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국왕을 추대한 세력으로 이미 세르비아 왕국의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 범세르비아주의
페타르 1세가 형식적으로만 흑수단Црна рука을 탄압하자 세르비아 군부가 세운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점차 세르비아 국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조직의 영향을 받은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애국주의로 무장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왕국의 번영을 위해 범세르비아주의를 외치며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1908년 8월 8일 민족 방어Народна одбрана를 발표하며 범세르비아주의를 주창했고 발칸반도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공에 맞써 남슬라브 민족국가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지역을 합쳐 대세르비아를 건국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호소한 프로파간다로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민족 방어Народна одбрана로 세르비아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흑수단Црна рука은 1911년 5월 9일 단체명을 단결 혹은 죽음Уједињење или смрт으로 재정했습니다. 흑수단은 세를 확장해 1914년에는 수백명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애국주의에 경도된 흑수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남슬라브 민족의 땅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압으로부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더불어 몬테네그로 왕국과 보스니아 공국을 합병하려고 했습니다. 몬테네그로 왕국은 세르비아 왕국에게 협조적이었고 몬테네그로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은 통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문제는 보스니아 공국으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통치령이었던 보스니아 공국은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갑자기 합병해버렸고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은 이에 항의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 이후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는 전쟁 위기가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단결 혹은 죽음Уједињење или смрт은 세르비아 민중에게 전쟁 불사를 독려했고 세르비아 민중은 전쟁을 각오했습니다.
- 사라예보 사건
허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 위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한 개혁가에 의해 무마될 수도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임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 차별을 철폐하고 민족 구성에 따라 행정구역을 개편한 뒤 모든 민족에게 동등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구상했습니다. 개혁안을 구상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카이저 직위를 유지하고 싶어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미움을 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탄압으로부터 남슬라브인을 구원한다는 세르비아 왕국의 신민들과 단결 혹은 죽음Уједињење или смрт 단체에게 명분을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1915년 6월 28일 보스니아 공국의 사라예보로 향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신문에 보도하게 했고 단결 혹은 죽음Уједињење или смрт 단체는 신문 정보에 따라 당일 암살단을 보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는 당일 암살단의 총격에 사망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 눈먼 애국주의와 파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식민지 확장을 통한 경제 성장을 위해 세르비아 왕국을 점령하고 싶어했습니다. 독일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지원하며 건설을 추진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가 통과하는 국가는 모두 독일제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국가들이었습니다. 오직 세르비아 왕국만이 반독일제국 세력 국가로 독일제국과 친독일제국 세력 국가는 세르비아 왕국을 제거해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를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독일제국과 친독일제국 세력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석유를 안전하게 수입하고 독일제국부터 오스만 제국까지 무역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을 점령해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고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연결의 공신이 되며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기 위해 세르비아 왕국 침공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침공 전 독일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백지수표를 받으며 지지를 확인한 후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의 민중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암살단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대세르비아 건국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호소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은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러시아 제국은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과 협상국 관계였기 때문에 세르비아 왕국은 협상국이 세르비아 왕국을 지지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허나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를 암살한 세르비아 왕국의 행동에 지지를 표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르비아 왕국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최후통첩문의 내용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의 정부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태도에 당황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다 국력이 약소해 전쟁에서 승산이 없었기에 최후통첩을 받아들일 지 고민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은 고민 끝에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8일 총동원령을 내려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자 세르비아 왕국은 전쟁 준비를 하지만 승산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리자 세르비아 왕국은 러시아 제국의 구원을 기대하며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애국주의에 경도된 독일제국의 장교들의 요구로 독일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하고 이어 프랑스 제3공화국에게도 선전포고하며 대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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