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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종료/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블로러 전쟁]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완성

by 롱카이. 2022. 3. 4.
  • 블로러Vlorë 전쟁

https://www.youtube.com/watch?v=FyvuuceNJo8

블로러 전쟁 하루 변화

 

  • 알바니아에 분 민족주의

알바니아 공국 국기
알바니아 공국 국기

알바니아 공국은 대전쟁 동안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알바니아 공국은 이름만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동맹국과 연합국은 알바니아 공국은 마음껏 침공하며 자기들끼리 알바니아 공국을 분할하고 지배했습니다. 대전쟁 동안 알바니아 공국은 외세의 간섭에 노출되었고 한없이 무력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왕국은 블로러Vlorë를 무력 점령한 상태로 종전을 맞이했고 전쟁 이후에도 블로러Vlorë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알바니아 공국 위에 세르비아 왕국을 비롯한 남슬라브 민족 국가들이 합병해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을 건국하자 알바니아 공국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1918년 11월 말 알바니아 정치인들은 두러스Durrës에서 알바니아 국가 의회를 건립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접촉해 알바니아 독립국 건립을 지원받았습니다.

알바니아 독립전쟁 국기
알바니아 독립 전쟁 동안 쓰인 국기

1918년 12월 7일 압디 토프타니가 라우프 피코의 사무소를 방문하고 다른 알바니아 장교도 모임에 참가해 알바니아 새 정부에 대해 논의했고 1918년 12월 19일 티라나 의회가 건립되면서 알바니아 중앙 의회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티라나 의회는 알바니아의 중앙 정부 역할을 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게 이탈라이 왕국이 무력 점령한 블로러Vlorë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티라나 의회의 요구는 묵살되었습니다. 또한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비네이인 왕국의 병력은 알바니아 북부를 점령하고 있었고 알바니아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알바니아 북부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황폐화해 알바니아 민족주의 운동의 근간을 제거했습니다. 알바니아 남부에서는 그리스 왕국이 북이프로스 합병을 위해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쟁 이후에도 승전국들은 알바니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알바니아인들에게 반외세 민족주의 기류가 흘렀습니다. 알바니아 티라나 의회는 1919년 열린 파리 강화회담에 참여해 알바니아의 독립을 주장했지만 강대국들은 알바니아의 주장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강대국들은 알바니아의 영토를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에 분할하기 위한 회의에 집중했습니다. 배신당한 알바니아는 1920년 1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루슈녀Lushnjë에 루슈녀 의회에서 알바니아 무장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알바니아 정치인들은 루슈너 의회를 종료하고 2월 티라나Tirana를 알바니아 수도로 정한 뒤 독립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

프랑스 제3공화국과 이탈리아 왕국,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그리스 왕국은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알바니아 공국 영토를 분할했지만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민족주의로 질서를 재편성하기를 원했던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은 1920년 3월 알바니아를 알바니아 공국으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은 파리 강화 회의를 강제로 취소하고 1920년 창설한 국제 연맹을 통해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서 알바니아 공국은 국제 사회에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로서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과 그리스 왕국은 독립한 알바니아 공국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했습니다. 허나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은 이탈리아 왕국의 반발을 우려해 알바니아 공국의 영토를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블로러Vlorë는 여전히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로 남았습니다. 이로서 블로러Vlorë는 알바니아 공국에게 최후의 미수복지였고 블로러Vlorë를 탈환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 블로러Vlorë 전쟁

알바니아 블로러 전쟁
블로러 전쟁

알바니아 정부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블로러Vlorë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왕국의 세티모 피아센티니 장군은 알바니아 정부의 요구를 거절했고 알바니아 정부는 1920년 6월 4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카짐 코쿨리 알바니아군 총사령관 휘하의 알바니아군 자원병들은 이탈리아군을 공격했습니다. 알바니아군은 열약한 환경으로 총 한자루만 지급받았고 총마저 없는 병사들은 돌을 들고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알바니아군은 열약한 환경에 처했지만 투쟁 의지는 엄청났고 반면 이탈리아군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축하하며 방비를 약화했습니다.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군의 공격에 놀라며 후퇴했습니다. 알바니아군이 승기를 잡자 미국으로 망명간 알바니아인들 중에서도 자원병이 늘어 자원병들은 미국에서 알바니아로 귀국해 블로러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반면 이탈리아 왕국 내부에서는 이탈리아 본토의 병사들은 블로러 전쟁 참전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탈리아 왕국 내부에 공산주의 혁명이 발발해 내부 혼란을 수습하느라 알바니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왕국은 1920년 8월 2일 알바니아 정부가 블로러Vlorë를 합병하는 것을 허락하고 병력을 블로러Vlorë에서 철군했습니다. 이로서 알바니아 공국의 국경이 확정되었습니다.


  • 혼란이 끝나지 않은 알바니아 공국

알바니아 공국 아흐메트 조구 대통령
아흐메트 조구

알바니아 공국은 마지막 외세인 이탈리아 왕국을 몰아내 알바니아 민족국가 완성에 성공했습니다. 허나 알바니아 공국은 공국의 상징적인 존재인 대공이 부재했고 여러 당이 난립하며 여러 정부가 세워지고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알바니아 공국에는 국가를 지도할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로 몇년간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었습니다. 알바니아 공국은 1925년 1월 31일 알바니아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알바니아 공국 군인 출신인 아흐메트 조구가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마침내 국내의 혼란이 멈췄고 정상적인 국가 운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흐메트 조구 알바니아 대통령은 알바니아 공국의 보수주의 무슬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서구식 개혁을 추진하며 이탈리아 왕국을 모방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친선관계를 도모했습니다. 허나 군주정을 폐지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흐메트 조구는 권위주의를 신봉했고 후에 스스로 국왕 조구 1세로 등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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