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의 해방
대전쟁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시리아السورية(아랍어: 수리아)와 레바논لبنان 지역의 아랍인들을 억압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파샤는 레바논 산 대기근으로 죽어가는 아랍인들을 구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랍인을 제거해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을 튀르크 민족의 땅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의 아랍인들은 튀르크인들의 잔혹한 행위를 비난했고 반발했지만 튀르크에게 진압당했습니다. 그러다 1918년 10월 5일 파이샬 빈 후세인과 이집트원정군이 다마스쿠스دمشق를 점령하고 시리아 아랍 왕국을 선포하면서 시리아 지역에 아랍 독립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파이살 빈 후세인은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해 시리아 아랍 왕국의 독립 인정을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 시리아 아랍 왕국의 출범
파이살 빈 후세인 시리아 아랍 왕국 국왕인 1919년 6월 28일 승전국들이 연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경을 확정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대영제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조르주뱅자맹 클레망소 총리는 회의 끝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시리아 아랍 왕국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영향권에 두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레바논لبنان과 시리아السورية 해안지방을 직접 식민통치하고 시리아 내륙 지역을 아랍 독립국으로 두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영향력 하에 놓기로 했고 대영제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이들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내륙 지역에 시리아 아랍 왕국을 건국하도록 추진했고 미합중국 역시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라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에 아랍 독립국 건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등 유럽에 있던 아랍 독립 의회들이 다마스쿠스دمشق로 복귀했고 이들은 시리아 아랍 왕국의 본격적인 출범을 위해 부던히 노력했습니다. 1919년 6월 3일 첫 시리아 아랍 왕국 의회가 등장했고 아랍 의회들은 선거를 통해 파이살 빈 후세인을 시리아 아랍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시리아 아랍 왕국 의회는 입헌군주제에 따라 파이살 빈 후세인 국왕과 아랍 의회를 설립했습니다.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자 시리아 아랍 왕국 의회는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꿈꿨습니다.
- 유럽과 미국의 배신
시리아 아랍 왕국은 아랍의 완전한 독립을 꿈꿨습니다.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왕 파이살 빈 후세인은 맥마흔 서한을 근거로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에 완전한 아랍 국가 건립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한 미합중국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은 수리아 아랍 왕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은 재빨리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경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입맛에 따라 정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시리아السورية 해안지대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직접 지배로 바꾸었고 팔레스타인فلسطين 지역과 메소포타미아الرافدين 지역을 대영제국 지배로 바꾼 후 시리아 아랍 왕국을 내륙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파이살 빈 후세인 국왕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독단적 행보에 분노하며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대영제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중동 지역을 프랑스 제3공화국과 분할하기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파이살 빈 후세인 국왕의 항의를 무시했고 미합중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탈리아 왕국의 발칸 분할안인 1915년 런던 조약을 비밀 협정이라는 이유로 기각했으면서 비밀 협정인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취소시키지 않았고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아랍을 분할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파이살 빈 후세인 국왕은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이는 파이살 빈 후세인 국왕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랍인들이 느낀 배신감이었습니다.
- 알라위 봉기
프랑스 제3공화국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후 시리아السورية 해안지대로 프랑스군을 파병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랍인의 동의 없이 해안지역을 무단점령했고 수많은 아랍인들이 이에 반발했습니다. 파아살 빈 알리는 아랍 민족주의를 외치며 유럽 군대로부터 아랍 무슬림들을 지키자고 호소했고 시리아 해안지대의 샤이크 살레흐 알 알리도 이에 동참해 프랑스군에 대항하기로 했습니다. 1919년 7월 샤이크 살레흐 알 알리는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의 시아파 세력인 알라위 세력을 모아 알라위군을 결성한 후 프랑스군을 기습공격해 패퇴시켰습니다. 이에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السورية 해안지대로 더 많은 프랑스군을 파병했고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 전체를 공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 시리아-프랑스 전쟁
파이살 빈 후세인 국왕은 1920년 3월 8일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국경을 확정하며 시리아 아랍 왕국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미합중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대영제국을 비롯한 국제 연맹은 1920년 4월 25일 이탈리아 왕국의 산 레모San Remo에서 산 레모 회담을 열어 아랍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세 국가는 만장일치로 아랍 지역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야 한다고 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바로 시리아 아랍 왕국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0Gyg2xiShM
프랑스 제3공화국이 시리아 아랍 왕국의 문제 해결을 논하기 전 아랍인들은 알라위 봉기와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 민족 봉기에 영향을 받았고 아랍 독립을 위한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랍군은 1920년 3월 1일 텔 하이תֵּל חַי에서 유대인 민병대를 공격해 유대인들을 추방했고 1920년 3월 13일 하나누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군을 공격했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해안가에서 함포 사격과 폭격기 폭격으로 대응했고 내륙으로 진입해 하림 전투를 벌여 아랍군을 격퇴했습니다. 시리아 아랍 왕국 동부의 베두인들도 영국령 인도제국군의 점령에 반발해 1920년 4월 사히크 공세를 펼쳤지만 우수한 화력으로 무장한 인도제국군에게 격퇴당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1920년 7월 시리아 아랍 왕국 내부로 침공하기 시작했고 1920년 7월 24일 마이살룬 전투에서 시리아 아랍군을 격퇴했습니다. 프랑스군은 7월 25일 바로 시리아 아랍 왕국의 수도 다마스쿠스دمشق를 점령해 파이살 빈 후세인 아랍 국왕을 국왕직에서 해임했습니다. 하지만 시리아 아랍군은 후방으로 후퇴해 끝까지 저항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 아랍군을 공격하며 시리아 아랍 왕국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했습니다. 이에 시리아 아랍군은 무스타파 케말에게 도움을 청했고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크 민병대를 시리아 아랍 왕국으로 파병해 함께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시리아 아랍군과 튀르크 민병대는 1920년 12월 알레포ﺣﻠﺐ에서 항전했고 프랑스군은 알레포 포위전에서 고전했습니다. 그 사이 시리아 아랍 왕국 내부에서 아랍 민병대들이 등장해 기독교인들과 유럽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군은 1921년 병력을 충원해 시리아 아랍 왕국 전역에 병력을 투입하며 아랍 민병대들을 소탕했고 오스만 제국에 본격적인 튀르크 독립전쟁에 발발하자 튀르크 민병대는 본국으로 이동했습니다. 프랑스군은 항공 폭격으로 아랍군을 공격하며 포위공격으로 섬멸해갔고 1921년 7월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시리아 아랍군은 프랑스군에게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수리아-프랑스 전쟁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의 기독교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리아 위임통치령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7월 25일 시리아 아랍 왕국 의회를 해산해 시리아 아랍 왕국을 멸망시키고 프랑스 행정부를 설립했습니다. 시리아-프랑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수리아 아랍 왕국과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얻은 지역에 다마스쿠스국, 알레포국, 알라위국, 자발 드루즈국, 알렉산드레타 산자크 자치령, 대레바논을 건국한 후 해당 국가들을 위임통치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가 등장했고 이는 훗날 시리아 공화국의 영토가 됩니다.
- 대시리아 봉기
프랑스 제3공화국은 시리아-프랑스 전쟁 이후 파이살 빈 후세인을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에서 축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에 남았고 그들은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에 살던 아랍인들은 순니파, 알라위 시아파, 기독교 세력 등 종교를 구분하지 않고 독립 하나를 위해 뭉쳤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에 살던 베두인 부족들 역시 프랑스의 지배에 반발했고 베두인 부족장은 프랑스 축출을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역시 아랍의 독립운동 낌새를 파악했고 아랍 독립운동 주동자들을 체포해 공개처형하며 이들의 독립의지를 꺾으려고 했습니다. 허나 프랑스 제3공화국이 압제를 가할 수록 수리아 아랍인들의 독립의지는 커졌습니다.
1925년 8월 23일 수리아 아랍 왕국의 부활을 주도한 두르즈 부족의 부족장 파샤 알 아트라시 술탄은 프랑스에 대항해 혁명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수많은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 그의 선언에 동참하며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수리아 베두인 부족의 전사들은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했고 프랑스군은 베두인 전사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후퇴했습니다. 상황은 베두인 전사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다급해진 프랑스 제3공화국은 프랑스령 모로코와 프랑스령 세네갈에서 병사들을 징집해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로 보냈습니다. 새로 투입된 프랑스 식민지부대는 많은 병력과 우수한 화기로 베두인 전사들을 진압해갔고 1927년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의 대시리아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이렇게 시리아 아랍인들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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