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1차 세계대전 종료/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무슬림의 불편한 동거

by 롱카이. 2022. 4. 14.
  • 시오니즘을 위한 곳

유대인 시오니스트의 시위
유대인 시오니스트의 시위

대영제국의 아서 제임스 벨푸어는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땅을 허락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벨푸어 선언에 환호하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1918년 전세계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모였습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유입에 반발했고 인구가 많아지면서 팔레스타인에 사회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미리 논의를 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대영제국의 지배와 중립화로 두자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고 1919년 파리 강화회의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대영제국 주도 하의 중립지역으로 두기로 최종 합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더 많이 이주했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의회가 건립되었습니다.


  •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영국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1920년 4월 25일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지역을 대영제국의 위임통치령으로 승인했고 대영제국은 요르단 계곡을 기준으로 서부에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건립하고 동부에 영국 위임통치령 트란스요르단을 건립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 트란스요르단은 후세인 빈 알리 에미르의 둘째 아들 압둘라 빈 후세인을 에미르로 추대해 아랍인의 자치정부가 되었고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은 아서 제임스 벨푸어를 비롯한 대영제국 시오니스트들의 적극적 후원 하에 1920년 7월 유대인의 지배 하에 들어갔습니다. 유대인 헐버트 루이스 사무엘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고등판무관이 되었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이에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은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유대 민족 국가로 만드는 작업을 더 추진했고 유대 민족 외 민족인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을 탄압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은 1922년 7월 24일 국제 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권을 인정받았고 유대인들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국가로 정의했습니다.


  • 팔레스타인 아랍 대봉기

팔레스타인 아랍군 봉기
팔레스타인 아랍군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 무슬림들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화에 반발했고 1929년 작은 봉기를 일으켰지만 바로 진압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을 탄압하는 유대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1930년 흑수단을 결성해 반유대인 반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935년 유대인 세력과 영국인들을 암살하며 저항했고 영국 경찰은 흑수단을 지휘한 알 까삼을 사살했습니다. 허나 알 까삼의 사망소식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아랍인들을 고무시켰고 아랍인들은 1935년 대봉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랍 대봉기는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1939년까지 이어진 아랍 대봉기에 수많은 유대인과 아랍 무슬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아랍 대봉기를 막기 위해 1939년 2월 7일 런던 조약으로 백지 발표를 해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의 이주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영국 경찰을 팔레스타인으로 파병해 아랍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며 하가나 유대인 무장조직을 지원하며 아랍군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아랍군은 1939년 대영제국과 유대인의 공격으로 진압되었고 이후 크게 세력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이후 유대인 세력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고향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둘의 불안한 동거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