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령 인도제국
남아시아의 거대한 인도아대륙은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문명이 태동한 인더스 문명 이래로 인도아대륙의 국가들은 한번도 통일되지 않고 수천년 간 분열되었습니다. 인도아대륙의 국가들은 수천년간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인도아대륙에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아대륙의 국가들은 따뜻한 기후와 집중 강우로 높은 식량 생산량과 면화 생산량을 자랑했고 인도아대륙의 국가들은 높은 생산성을 가졌습니다. 더불어 인도에서 집중생산되는 후추 등의 향신료는 전세계 국가들을 매료시켰고 서유럽 국가들은 직접 그 향신료를 찾아나서며 대항해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항해 시대로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 유럽 식민지제국들은 인도아대륙에 해안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후 인도아대륙을 두고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7년 전쟁 등을 거친 후 인도아대륙에서 최후의 승자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되었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 제국 등 인도아대륙의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며 영국 동인도회사 인도를 건국했습니다. 그 뒤 1885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국명을 바꿨습니다.
- 영국령 인도제국의 반영운동
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령 인도제국을 건설한 후 인도에 여러 회사를 세우며 인도인들을 착취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면화 사업을 추진하며 수많은 인도인들을 목화 농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하게 만들었고 아편전쟁을 위해 아편도 대량 생산하는 등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 부를 인도인들에게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오히려 인도제국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물자를 생산하고 인도제국에 값비싸게 되팔아 막대한 마진을 남겼고 인도 현지인들은 저임금 고물가에 고통받았습니다. 인도인들은 영국 동인도회사 인도 시절 1857년 세포이 항쟁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20세기 초 민족주의 개념을 받아들여 인도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발 강가다르 틸락을 중심으로 한 급진주의자들은 인도아대륙에서 대영제국을 완전히 몰아내자고 주장했고 다다바이 나오로지와 고팔 크리스나 고칼을 중심으로 한 온건주의자들은 대영제국의 자치령이 되자고 주장했습니다. 발 강가다르 틸락의 급진주의자들은 인도 독립을 위해 마하슈트라, 벵골, 편자브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고 영국령 인도제국 정부는 영국령 인도제국이 힘을 합쳐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05년 10월 16일 벵골 분할령을 발표해 벵골의 힌두교인과 무슬림을 분할하고 둘의 분열을 유도했습니다. 그러자 발 강가다르 틸락은 인도 민족독립 운동을 더 추진해 인도 독립운동이 심화되었고 영국령 인도제국 정부는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발 강가다르 틸락을 체포해 인도 민족독립 운동을 탄압했습니다. 발 강가다르 틸락이 체포되자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구심점이 사라졌고 1906년 12월 30일 설립된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1909년 벵골 분할령을 받아들였습니다.
- 가다르 운동
인도 독립주의자 인사들이 체포되고 전인도 무슬림 연맹이 벵골 분할령에 찬성하자 인도 독립운동은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반영 인도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고 영국령 인도제국이 아닌 해외에서 인도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캐나다 자치령, 미합중국, 상하이上海, 홍콩香港에서 수많은 힌두교도, 무슬림, 시크교도, 카톨릭인이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여 반영 인도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1913년 1월 1일 힌두스탄 가다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해 영국령 인도제국과 전세계에 인도 독립운동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 가다르 봉기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전세계에서 가다르 운동으로 인도 독립을 호소하는 중 영국령 인도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14년 4월 4일 영국령 인도제국의 편자브 주에서 코마가타 마루 증기선에 캐나다로 이주하려는 인도인들이 탄 후 증기선이 캐나다 자치령으로 이동했습니다. 증기선은 5월 23일 캐나다 자치령의 벤쿠버Vancouver에 도착했는데 캐나다 자치령의 경찰이 증기선에 탄 승객 376명 중 24명만 하선하고 남은 인원들을 도로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승객들이 가다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코마가타 마루 증기선은 1914년 9월 27일 영국령 인도제국의 콜카타কলকাতা에 도착했고 영국령 인도제국 식민경찰들은 승객들에게 총을 쏘며 승객들을 사살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이에 수많은 인도 독립운동가들이 분노해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복귀해 독립운동을 벌이고 일부는 미합중국과 독일제국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미합중국은 먼로 독트린으로 유럽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대영제국에게 민감한 문제인 영국령 인도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은 이미 대영제국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대영제국에게 중요한 영국령 인도제국을 혼란에 빠뜨리면 대영제국을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은 인도 독립운동가들에게 폭탄 등의 병기를 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인도 독립운동가들은 독일제국의 폭탄을 받고 세포이 부대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1915년 1월 27일 싱가포르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춘절을 맞이해 중화민국 본토로 돌아간 틈을 타 무장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세포이 부대는 싱가포르 항구의 대영제국 왕립 해군 전함을 불태우고 영국군과 경찰들을 공격했습니다. 카드머스 슬로프함의 부함장 마틴 제람은 무선통신으로 지원을 요청했고 카드머스 슬로프함이 바다에 몸을 피하는 동안 세포이 부대는 싱가포르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2월 17일 프랑스 해군의 몽칼름 순양전함과 러시아 제국 해군의 오렐 수송함, 일본제국 해군의 오토와 방공순양함과 쓰시마 순양함이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연합군은 싱가포르에 상륙해 세포이군을 진압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일어난 가다르 봉기는 실패했지만 1915년 2월 영국령 인도제국 전역, 특히 편자브주와 인도제국 중부에서 가다르 봉기가 집중적으로 일어났고 독일제국은 시암(태국)과 미얀마에 독일제국 해군 전함으로 인도 독립운동가에게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가다르 봉기는 1915년 가을부터 심화되었고 191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벵골, 미얀마, 안다만 제도에서 대규모 가다르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 인도-독일원정단의 카불 임무
독일제국은 1915년 1월 가다르 봉기를 지원하고 1915년 4월 인도-독일원정단을 영국령 인도제국의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했습니다. 인도-독일원정단의 목표는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의 하비불라 칸을 설득해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부터의 독립하게 하고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독일원정단은 오스만 제국에서 출발해 중립국인 카자르 제국을 지나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독일원정단은 3달 간의 강행군에 지쳤고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에는 물이 부족해 식수 보급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하비불라 칸을 만나러 계속 이동했고 1915년 10월 26일 파그만پغمان의 궁전에서 하비불라 칸 에미르를 만났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토후국 대표와 인도-독일원정단은 1915년 12월까지 협상을 진행했고 1916년 1월 26일 독일-아프간 친선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1916년 연초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카자르 제국을 점령하고 러시아 제국은 에르주름 공세로 오스만 제국의 북부를 점령해 인도-독일원정단의 복귀로를 차단했습니다. 더불어 영국령 인도제국 정부는 스파이를 보내 하비불라 칸 에미르에게 가짜 정보를 주며 인도-독일원정단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하비불라 칸 에미르는 가짜 정보를 믿고 독일-아프간 친선조약과 동맹국 가입 약속을 취소한 후 인도-독일원정단을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에서 추방했습니다. 인도-독일원정단은 중립국인 중화민국으로 도망쳐 1919년 대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베를린Berlin으로 복귀했습니다.
- 실패한 힌두-게르만 운동
1915년 12월 25일 가다르 봉기도 1916년 연초에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의 동맹국 가입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 독립운동가들은 영국령 인도제국을 떠나 미합중국으로 도망쳐 미합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인도 독립운동가와 독일제국에서 파병한 지원자들은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했고 대영제국의 정보기관은 미합중국에서 인도 독립운동가들과 독일인 지원자들을 하나씩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1917년 1월 16일 치머만 전보사건으로 미합중국 내에서 반독 정서가 고조되자 독일제국의 지원을 받는 인도 독립운동은 여론의 눈치에 따라 수그러들었고 1918년 독일제국이 멸망하면서 인도 독립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힌두-게르만 운동은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큰 획을 그은 운동으로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은 그 전보다 더 뚜렷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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