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안스카이의 사망
1912년 신해혁명으로 대총독이 된 위안스카이는 정치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그에게 반발하는 사람을 숙청하며 권력을 휘둘렀고 1915년 12월 12일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중화제국을 건국했습니다. 이는 공화국을 추구한 중화민국임시정부와 상반된 정치 체제였고 남부 군벌 세력인 탕지야오, 리위안훙 세력이 위안스카이 정벌을 천명하며 1915년 12월 25일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 전쟁을 호국 전쟁이라 불렀고 윈난성에서 북진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일본제국이 위안스카이를 도와줄 것을 기대했지만 일본제국은 위안스카이를 돕지 않았고 유럽 국가들도 제1차 세계대전에 집중하며 위안스카이에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중화제국군은 남부 군벌에게 밀려났고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6월 병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호국군을 이끈 돤치루이와 리위안훙는 위안스카이를 제거했고 돤치루이는 국무총리가 되고 리위안훙은 대리총통이 되어 중화민국을 지배했습니다.
- 부원지쟁府院之爭
위안스카이는 1914년 7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화민국임시정부는 중립국을 유지한다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대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영제국은 중화민국에게 연합국으로 참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 요구에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은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돤치루이 국무총리는 중화민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해 연합국이 승전하면 동맹국인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의화단 운동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지고 승전국으로서 조차지를 돌려받고 경제적 보상을 얻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반면 리위안훙은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박인 연합국 참전 대신 중립국을 고수할 것을 추구했고 중화민국의 국회의원들도 대부분 중립국 고수를 추구했습니다. 이에 돤치루이 국무총리는 국회의원들을 무력으로 위협해 돤치루이 주장에 따를 것을 강요했고 국회의원들은 리위안훙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리위안훙은 대리총통직의 권한을 사용해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직에서 해임했습니다.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서 해임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쫒겨났고 그는 베이징北京 바로 아래에 있는 톈진天津으로 가 부하들을 모아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쑤저우蘇州 장강순열사인 장쉰은 리위안훙 타도 운동을 전개하는 돤치루이에게 접근해 그와 함께 리위안훙 타도 봉기를 진행했습니다. 돤치루이와 장쉰은 톈진天津을 비롯한 중화민국의 여러 성을 독립시키고 베이징北京 정부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리위안훙은 타협을 제안했고 장쉰은 돤치루이 세력의 대표로 베이징北京에 갔습니다. 베이징北京에 입성한 장쉰은 그의 본색을 드러냈는데 청나라의 충신이었던 그는 중화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청나라 복귀를 염원해 베이징北京 입성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쑤저우蘇州 장강순열사였던 그는 그가 원하는데로 베이징北京에 입성할 수 없었고 돤치루이 봉기에 가담해 베이징北京 정부에게 베이징北京 입성을 허락받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돤치루이 봉기 덕분에 대표단으로 베이징北京에 입성했고 1917년 6월 30일 자금성에 입궁해 3천명의 사병으로 리위안훙을 위협해 중화민국 국회를 해산했습니다.
- 장훈복벽으로 황제가 된 선통제
그는 1917년 6월 30일 중화민국 국회를 해산하고 어전회의를 연 후 선통제 복위와 청나라 부흥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서 3살에 즉위해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의 협박으로 황제 자리에서 폐위된 선통제는 1917년 7월 1일 청나라의 황제로 복위했습니다. 혹자는 장훈복벽의 배후에 중화민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기를 원치 않았던 독일제국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쉰이 뜬금없이 장훈복벽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키자 공화정을 추구했던 돤치루이는 장쉰의 배신에 분노했고 7월 3일 안휘군벌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北京을 침공했습니다. 장쉰은 사병으로 돤치루이 군벌의 공격에 대항했지만 패퇴해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도피했습니다. 장쉰이 사라지자 선통제는 즉위 12일인 7월 12일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돤치루이는 1917년 7월 14일 베이징北京을 함락했습니다.
- 북양정부의 연합국 참전과 호법전쟁
베이징北京을 점령한 돤치루이는 중화민국의 독재자로 등극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 참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의 요구에 따라 유럽전선에 노동자를 보냈습니다. 돤치루이는 연합국의 소임을 다함으로서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이 일본제국의 중화민국 침공을 저지해줄 것을 믿었습니다. 돤치루이는 서부전선으로 안휘군벌 병력을 보낼 것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군벌 내전인 상황에서 병력을 줄이는 것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안휘군벌 파병은 취소했습니다. 대신 그는 연합국이라는 명분으로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에 경제적 지원을 받고 안휘군벌 병사들을 증강시켰고 강한 안휘군벌 병력으로 중화민국 전체를 독재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쑨원 등 지식인과 군벌은 반발해 베이징北京의 정치인들에게 광저우廣州로 남하해 함께 봉기를 일으킬 것을 호소했고 서남군벌과 함께 호법정부를 건설하고 호법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호법정부는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대립했고 호법전쟁으로 갔습니다. 1917년 9월 29일 시작된 호법전쟁은 호법군의 우세로 북양정부군이 내란에 빠졌고 호법군은 윈난과 푸젠을 차지했지만 계속되는 내전에 둘은 1918년 11월 26일 타협책을 찾고 내전을 중단했습니다. 연합군 참전을 두고 중화민국은 내전을 일으켜 서로를 죽이는 참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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