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암 짜끄리 왕조
19세기 중반 유럽 강대국들은 미지의 대륙인 청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청나라에 접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에 가까운 지역들은 청나라 식민지화를 위한 전초기지로 주목받았고 유럽 식민제국들은 청나라 주변국을 식민지화했습니다. 청나라 바로 아래에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 역시 유럽 식민제국들의 식민지화 대상이었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가장 먼저 식민지화한 국가는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은 1883년 베트남 응우옌 왕조가 왕조 건립에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명분삼아 응우옌 왕조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1884년에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를 식민지화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베트남을 식민지화해 청나라의 광둥廣東 지역을 식민지화할 전초기지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전초기지를 만들자 대영제국 역시 영국령 인도제국에게 사주해 1885년 미얀마 꼰바웅 왕조를 침공해 영국령 인도제국의 일부로 만들어 청나라 윈난云南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습니다. 남은 것은 인도차이나 반도 중부의 짜끄리 왕조였습니다.
타이 짜끄리 왕조는 전 왕조인 딱신 왕조 때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타이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정복전쟁이 끝나자 딱신 대왕은 임기 말기에 폭정을 저질러 나라를 어지럽혔고 이에 타이 관료들은 딱신 대왕을 유패시켜 딱신 왕조를 멸망시키고 짜끄리 왕조를 건립했습니다. 짜끄리 왕조는 딱신 왕조의 영토를 보존하며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국 자리를 유지했지만 1883년부터 시작된 유럽 강대국의 침공에 노출되었습니다. 이에 짜끄리 왕조의 라마 5세 쫄랑롱꼰 대왕은 신무기로 무장한 유럽 강대국과의 전면전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짜끄리 왕조의 드넓은 영토와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 간의 긴장관계를 잘 이용했습니다. 그는 국제정세에 눈이 밝았고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이 협력과 긴장을 오가는 미묘한 관계임을 눈치챘고 그들의 목표는 청나라 식민지화임을 진작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에 접근해 그들이 원하는 영토를 조금씩 주면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식민지 사이에 중립국 있어야 두 국가가 불필요하게 충돌하지 않음을 역설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라마 5세 쫄랑롱꼰 대왕의 말에 동의했고 짜끄리 왕조의 영토를 조금씩 얻으며 짜끄리 왕조의 중심지인 방콕กรุงเทพ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쫄랑롱꼰 대왕은 이 대나무 외교로 영토 일부를 내어주며 짜끄리 왕조를 보존했고 타이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끝까지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철도를 건설하고 근대 행정조직을 신설해 타이의 근대화를 추진했고 타이 짜끄리 왕조는 서구식으로 근대화되었습니다.
-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
대나무 외교와 타이의 근대화로 독립국 존속에 성공한 라마 5세 쫄랑롱꼰 대왕은 1910년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타이 짜끄리 왕조의 새 국왕으로 즉위한 라마 6세는 영국령 인도제국의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타이 민족주의 발흥에 힘썼습니다. 그는 타이에 새 도로, 철도, 근대 병원, 은행, 공항 등을 건립했고 타이 근대군을 새로 편제해 타이 국방을 강화하고 민족주의 사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덕분에 타이는 근대화를 발전시켜나갔고 유럽 강대국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빠르게 근대국가로 성장했습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힌두-게르만계 운동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유럽 국가들과 일본제국이 지구 전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은 타이 근대화 확립에 집중했습니다. 연합국과 동맹국은 타이를 신경쓰지 않았고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 역시 전쟁에 참전하기보다는 타이를 더욱 강화시키는데 그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1915년 1월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힌두-게르만계 운동이 벌어져 영국령 인도제국 전역에 독립운동의 물결이 휘몰아쳤고 영국령 인도제국은 내부 통제에 급급했습니다. 라마 6세 와치라웃은 영국령 인도제국에 편지를 보내 영국령 인도제국 정부를 지원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는 연합국 편에 설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이 근대화에 힘을 더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타이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그는 타이 근대화의 일부인 쌀 품종개량과 타이 근대군 확립에 힘을 쏟았고 1916년 그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은 타이 민족주의를 타이 민중에게 확립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결정했고 1916년 9월 22일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그는 선전포고 후 타이 민중에게 민족주의를 고무시키기 위해 민족의 상징인 국기를 교체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코끼리가 그려진 전 국기는 그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이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왕자 시절 대영제국과 일본제국 등 근대 강대국을 견학하며 민족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타이의 근대화를 위해 민족주의가 필수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이 민족주의를 잘 보여주는 타이 민족 상징을 분명히 만들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국기의 코끼리 그림은 그리기 어렵고 직관적이지 않다 생각했고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미합중국의 국기를 참고해 9월 28일 새 국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붉은색, 흰색, 파란색 세 색으로 구성된 직관적인 국기를 만들어 민중이 손쉽게 국기를 만들고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고 타이의 새 국기는 타이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건이 되었습니다.
국기를 새로 만든 후 라마 6세 와치라웃 국왕은 1917년 9월 의무병, 정찰병, 정비병으로 구성된 시암원정군을 결성해 서부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시암원정군은 1918년 7월 30일 마르세유Marseille에 도착해 8월 1일 제2차 마른 전투와 뫼즈-아르곤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시암원정군은 최전방 참호에서 의무병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부상당한 연합군 병사들을 응급조치하는 활약을 펼쳤고 전투 승리에 기여를 했습니다. 시암원정군은 연합군의 백일전투에 참전해 연합군을 따라 북상했고 1918년 11월 연합군을 따라 라인란트Rheinland로 진격하며 노이슈타트안데어하르트Neustadt an der Haardt를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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