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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서부전선

[서부전선: 베르됭 전투 1편] 프랑스군을 격멸하라

by 롱카이. 2022. 2. 1.
  •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

1914년 시작된 전쟁은 어느덧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이 1년 이내에 종식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서부전선에 참호선이 생기고 동부전선에 러시아군이 광활한 러시아 평원에서 끝없이 도망가며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연합국과 동맹국은 지쳤습니다. 특히 프랑스를 굴복시키려고 했던 독일제국은 슐리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더 초조해졌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의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1916년에라도 프랑스를 완전히 꺾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에리히 폰 팔켄하인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총참모장은 1914년부터 1915년까지의 전투를 복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역대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보다 몇 배 더 많은 피해를 입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팔켄하인은 전과를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질적으로 열등한 군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를 한 곳에 모아 모두 소탕해버려 프랑스군 지휘부의 전쟁의지를 꺾어버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대전쟁을 끝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좌), 에리히 루덴도르프(우)

하지만 에리히 폰 팔켄하인의 의견에 반대한 독일군 장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였습니다. 두 장성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러시아 영토로 진격하며 폴란드 땅을 얻어내는데 큰 공을 세운 장성들로 독일제국 신민에게 국가적 영웅으로 추양받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전투경험으로 서부전선에서 참호를 파고 철통수비하는 프랑스군 대신 질적으로 심히 낙후된 러시아군과 싸워 러시아에게서 먼저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허나 서부전선의 실질적 지휘를 맡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자존심 때문에 동부전선의 영웅들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이 영토가 광활하고 나폴레옹도 물리친 국가이므로 서부전선의 프랑스를 먼저 물리치고 러시아에 대한 제한적인 총공세를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군 주력병력을 한꺼번에 소멸시킬 장소를 모색했습니다. 비교 끝에 그가 선택한 곳은 베르됭 요새로 당시 프랑스군과 독일군 양측에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장소였습니다.


  • 프랑스의 자존심 베르됭 요새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요새 지도
베르됭 요새도시 지도

서부전선 남부 뫼즈Meuse에 있는 베르됭Verdun은 프랑스에게 상징적 의미가 큰 도시였습니다. 베르됭Verdun은 5세기 훈족 아탈리의 침공을 막아낸 요새도시였고 843년 프랑크왕국을 셋으로 분할하는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끝까지 항전한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베르됭은 프랑스의 항전을 상징하는 도시였고 몇세기 동안 세운 요새들은 베르됭 요새도시를 여러개의 요새들이 합쳐진 하나의 거대한 요새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전쟁 중 프랑스는 베르됭 요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독일군이 베르됭 요새를 점령한다면 프랑스군은 항전의 상징성을 되찾기 위해 베르됭 요새를 탈환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총참모장은 프랑스군이 베르됭에 관심을 표하지 않는 시점에서 독일군이 베르됭요새를 점령해 프랑스 주력병력을 베르됭 요새로 집결하게 한 뒤 거대한 회전을 벌여 프랑스 주력부대를 일시에 전멸시키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믿었습니다. 회전으로 적을 소멸시켜 적의 전쟁의지를 꺾어버린다는 전략은 프로이센 때부터 이어진 독일군의 기본 전략 개념이었습니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 총참모장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했듯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려고 했습니다.


  • 프랑스의 안일한 대비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베르됭
서부전선 베르됭

서부전선의 총지휘권을 맡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 총참모장은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작전을 설명하고 승인을 받았습니다. 팔켄하인 총참모장은 독일 제5군 9개 사단과 예비군 사단을 동원해 프랑스 베르됭 일대를 포위했습니다. 독일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포착한 프랑스의 에밀 드리앙 대위는 프랑스 조제프 조프르 총참모장에게 베르됭 요새의 방비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으나 조제프 조프르 총참모장은 이를 독일군의 기만작전이라 판단하고 베르됭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에밀 드리앙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베르됭 요새는 결국 준비를 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독일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포커 아인데커 전투기를 보내 정찰활동을 벌이는 프랑스군 정찰기를 모두 격추하며 베르됭 일대에 대한 정찰을 막았습니다. 때문에 프랑스군은 베르됭 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습니다.


  • 공격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 독일군 베르됭 전투
베르됭을 포격하기 위해 동원된 독일군 야포

독일 제5군의 지휘권을 가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장군은 1916년 2월 21일 베르됭 요새에 대한 집중 포격을 명령했습니다. 약 1400문 이상의 야포들이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고 독일군은 4일간 포격 공격을 지속하며 1000000발 이상의 탄약을 소모했습니다. 일제 포격이 끝나고 독일군은 정예부대 스트룸투르펜Sturmtruppen을 보내 요새를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요새 주변
베르됭 요새와 주변 요새

독일군은 프랑스 베르됭Verdun 요새 근처 요새들을 모조리 포격했고 독일군의 기습 포격에 요새들은 점차 무너졌습니다. 독일군은 특정 요새를 목표로 포격을 해 요새를 무너뜨려 방어선을 파괴하고 포격 후 바로 독일제국의 돌격대원 스트룸트루펜Sturmtruppen이 수류탄과 화염방사기 등으로 무장한 채 돌격해 프랑스군 요새를 점령하는 작전으로 요새를 하나씩 점령해나갔습니다. 사정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프랑스군은 대응도 못해보고 전방요새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후방으로 후퇴했습니다. 독일제국의 공세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졌고 베르됭 요새까지 빠르게 진격했습니다.

 

베르됭 요새를 포격하는 독일군
베르됭 요새를 포격하는 독일군

1916년 2월 24일 베르됭 요새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2월 25일 최후방 두오몽Duaumont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두오몽Duaumont 요새는 베르됭 요새 바로 앞 요새로 전통적인 프랑스의 철옹성 요새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포격과 돌격대원의 공격으로 철옹성 두오몽Duaumount 요새를 점령하고 베르됭 요새를 목전에 두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요새 파괴
베르됭 전투 전후 두오몽 요새

독일군은 프랑스의 천혜요새 두오몽Douaumont 요새를 점령하자 사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독일군은 기습 돌격으로 지쳤지만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허나 프랑스 제2군 필립 페탱 장군이 뫼즈Meuse 강에서 독일군 측면을 향해 포격하며 독일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강한 포격에 독일군은 두오몽Douaumont 요새로 후퇴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군 필리프 페탱
필리프 페탱 장군

독일군 동부부대가 두오몽Duaumont 요새에서 공세가 꺾일 때 서부부대는 서쪽에서 공격해왔습니다. 독일군은 빠르게 주요 고지들을 점령해갔고 304번 고지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304번 고지에서 막혔습니다. 프랑스군의 필리프 페탱 장군은 26일부터 29일까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습니다.


  • 베르됭 요새와 프랑스의 영웅 필리프 페탱 장군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프랑스 보급선
프랑스군 보급로

프랑스군의 필리프 페탱 장군은 열약한 환경 속에서 독일군의 대공세를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준비를 하지 않은 베르됭 요새에 있는 프랑스군은 탄약과 구급물자 등 여러 물자들이 부족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 상태로는 독일군의 재공세를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리프 페탱 장군은 새로운 보급선을 만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프랑스 보급행렬
보급로로 물자를 수송하는 트럭들

필립 페탱 장군은 프랑스 바르르뒤크Bar-le-Duc에서 베르됭Verdun까지 보급선을 만들었습니다. 베르됭 요새의 프랑스군은 이 보급선으로 대량의 병력과 물자들을 보급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프랑스군은 베르됭 요새의 방어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베르됭 요새의 프랑스군과 프랑스를 살린 그 보급선은 신성한 길Voie Sacrée로 불렸습니다.

또한 필리프 페탱 장군은 공격적 공세를 주장하는 다른 프랑스군 장교와 달리 방어적 입장을 고수하며 무모한 돌격공격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지휘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했습니다. 더불어 병력 교대 시스템을 도입해 병력들을 일정시간마다 교대하며 병사들이 피로에 장시간 노출되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병사를 위한 지휘로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베르됭 요새를 지킨 공로로 프랑스의 영웅으로 추양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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