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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서부전선

[서부전선: 베르됭 전투 2편] 피로 물든 진흙탕

by 롱카이. 2022. 2. 1.
  • 공격을 계속할 것인가?

베르됭 전투 티아몽 요새 전투
베르됭 전투 티아몽 요새 전투

필리프 페탱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은 1916년 2월 29일까지 독일군을 막아내며 베르됭Verdun 요새를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프랑스가 베르됭 요새를 신경쓰지 않아 요새를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독일제국군은 프랑스군의 완강한 저항에 당황하며 공격을 멈췄습니다. 베르됭 요새 공격을 지시한 에리히 폰 팔켄하인도 예상과 다른 프랑스군의 방어에 놀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슈미트 폰 크노벨스도르프 장군
슈미트 폰 크노벨스도르프 장군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베르됭 요새 기습공격에 실패했고 아군 피해가 생기자 공격을 중단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팔켄하인 총참모장은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서한을 보내기까지 하며 진지하게 공세를 중단할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 제5군 참모장 슈미트 폰 크노벨스도르프 보병대장은 공세를 지속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했습니다. 크노벨스도르프는 호전적인 장군을 일선 담당으로 보내며 적극적으로 공세를 하려 했고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독일제국의 베르됭 요새 공세를 허락했습니다.


  • 베르됭 요새 재공세

독일군의 공격
독일군의 공격

결국 3월 28일 독일군은 재공세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필리프 페탱 장군 명령 하에 보급선을 만들어 베르됭 요새로 병력과 탄약을 보충하고 방어 무장을 강화했습니다. 독일군은 이전보다 더 강화된 베르됭 요새 방어선에 막혔고 뫼즈강 방면에서 공격에 나선 독일군도 프랑스군의 강화된 방어선에 막혔습니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베르됭 요새 근처와 뫼즈강 방면 능선에서 기지를 점령하고 빼앗기고 탈환하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4월까지 이어진 공방전으로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각자 약 8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강해진 수비에 고전하고 있었지만 독일 제5군 지휘부는 끊임없이 돌격만을 외쳤고 수많은 독일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 프랑스군의 성급한 반격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로베르 니벨 장군
로베르 니벨 장군

적극적 공세를 고집한 조제프 조프르 프랑스 총참모장은 수비자세로 일관하는 필리프 페탱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페탱은 베르됭 요새를 수호한 프랑스 영웅이었기에 조제프 조프르 총참모장은 필리프 페탱을 마음대로 좌천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제프 조프르 총참모장은 1916년 5월 필리프 페탱을 승진시키며 베르됭 요새를 막는 프랑스 제2군 사령관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프랑스 제2군 사령관으로 로베르 니벨을 임명했습니다. 로베르 니벨은 적극적 공격을 주장하던 인물로 조제프 조프르 총참모장의 사상에 가장 잘맞는 인물이었습니다. 프랑스 제2군에 임명된 로베르 니벨은 적극적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항전
프랑스군의 항전

그 와중 1916년 5월 20일 독일군이 엄청난 출혈 끝에 베르됭 서쪽 시체고지 점령에 성공하지만 프랑스군 제2 방어선에 막혀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로베르 니벨은 베르됭 요새 앞에 주둔하는 독일군을 향해 공세를 명령했고 프랑스군은 베르됭 요새 바로 앞에 있는 두오몽Douaumont 요새를 탈환하러 공세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두오몽Douaumont 요새에서 강한 방어선을 형성했고 프랑스군을 도륙했습니다. 로베르 니벨 장군은 두오몽Douaumont 요새 공세로 수많은 프랑스군을 하루아침에 잃었지만 꿈적하지 않고 공세에 열중했습니다.


  • 독일의 절치부심

베르됭 전투 전장
베르됭 전투 전장

로베르 니벨 장군은 전략없이 무조건적인 돌격을 명했고 참호에 몸을 숨긴 독일군은 아무 작전없이 돌격하는 프랑스군을 쉽게 물리쳤습니다. 니벨 장군의 무식한 돌격명령으로 프랑스군은 수많은 병력을 빠르게 잃어갔고 상황은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공세에 나섰습니다.

포격으로 지옥이 된 전장
포격으로 지옥이 된 전장

독일군은 초반 공세와 똑같이 포격으로 요새를 파괴하고 포격이 멈추면 스트룸트루펜Strumtruppen이 바로 돌격해 프랑스군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요새 점령에 나섰습니다. 독일군은 6월 7일 보Vaux 요새를 점령하고 티오몽Thiaumont 요새와 플뢰리-드벙-두오몽Fleury-devant-Douaumont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독일군은 이어 가스탄 공격까지 동원하며 1916년 6월 23일 베르됭 요새 바로 앞 수빌Souville 요새까지 공격해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독일군은 수빌Souville 요새까지 점령하며 베르됭 요새 5km 앞까지 진격했습니다.


  • 베르됭Verdun 요새 바로 앞에서 끝난 공세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군 포스터
프랑스군 프로파간다 포스터

독일군이 베르됭 요새 바로 앞에 나타나자 로베르 니벨 장군은 Ile Ne Passeront Pas!(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프랑스군에게 베르됭 요새에서 결사항전을 명령했습니다. 니벨 장군의 말은 프랑스 전역에 널리 알려졌고 프랑스는 이 명언을 제1차 세계대전 프로파간다 선전에 사용했습니다.

프랑스군의 보급
프랑스군의 보급

허나 프랑스군의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재공세로 25만명의 병력을 잃었고 때문에 솜 전투로 파견한 프랑스군 4개 예비사단을 베르됭 전선으로 모두 보내야했습니다. 독일군 역시 재공세로 20만명의 병력을 잃어 베르됭 요새 바로 앞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빨리 병력을 보충한 뒤 베르됭 요새를 점령할 준비를 했지만 7월 솜므 방면에서 영국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병력을 분산배치할 수 밖에 없었고 베르됭 요새로 충분한 병력이 동원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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