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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병합] 게르만 통일

by 롱카이. 2022. 12. 15.
  •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연방의 갈등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의 오랜 논쟁은 같은 게르만 국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해야하는가였습니다. 1866년에는 그 해답으로 통합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하고 북독일연방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양강분열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힘을 합쳐 다시 강성한 게르만국가로 성장하기를 원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국명을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정한 이유는 위의 이유였습니다. 허나 승전국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통합을 금지했습니다. 그렇게 둘은 통일하지 못했고 그 사이 두 국가에 새 독재자가 등장했습니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엥겔베르트 돌푸스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경지대에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제국에서 일생을 보냈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서 활동하는 동안 무국격자가 되었다가 1933년 독일국의 수상이 되면서 독일국 국적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통일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도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에 동의하며 독일-오스트리아 통일을 주장했고 1933년 과격한 백색테러를 일으키며 독일-오스트리아 통일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조국전선Vaterländische Front을 지휘한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수상이 되어 오스트리아 연방을 건국하고 독일국과의 통일을 반대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의견충돌을 보였고 오스트리아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원은 엥겔베레트 돌푸스를 암살했지만 베니토 무솔리니는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을 규탄하며 독일국이 오스트리아 연방을 침공 시 이탈리아 왕국도 참전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의 통일은 무산되었습니다.


  • 변화된 정세
독일국 티르피즈 비스마르크급 전함
독일국 티르피즈 비스마르크급 전함

1935년 3월 독일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국을 재무장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의 루르 점령으로 독일국에게 우호적이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국제 여론에 마음놓고 군대를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은 위기를 느끼고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이탈리아 왕국 3국이 대독일 공동전선을 형성해 이에 대항했습니다. 독일국과 공동전선 사이의 전운이 고조되었고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던 대영제국은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독일국은 별도의 해군조약이 없어 무제한 군사력 확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한정 군사력을 키워 대영제국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차라리 독일국의 무장을 허용하되 조약을 맺어 제한을 두는 것이 실리적이다고 판단했고 1935년 6월 18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맺었습니다.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국의 재무장은 인정을 받았고 1936년 독일국이 에티오피아 왕국을 침공한 이탈리아 왕국을 지원하면서 독일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관계가 개선되었습니다.


  • 오스트리아 연방을 압박하다
쿠르트 슈슈니크
쿠르트 슈슈니크

독일국은 이탈리아 왕국을 포섭하자 오스트리아 연방에 개입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쿠르트 슈슈니크 오스트리아 연방의 총리에 접근해 오스트리아 연방의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아돌프 히틀러는 쿠르트 슈슈니크를 자주 초청해 여러 요구사항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쿠르트 슈슈니크는 1938년 2월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원인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주장하며 백색테러를 일으켰고 쿠르트 슈슈니크는 오스트리아 연방의 안보를 걱정했습니다. 이에 그는 오스트리아 국민투표를 열어 오스트리아 연방이 독일국으로부터 확고한 독립을 보장받기를 원했고 1938년 3월 13일 국민투표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때 그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경도된 20대를 국민투표에서 제외시켜 노골적으로 오스트리아 연방 유지 의지를 표했습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를 분개하게 만들었습니다.


  • 안슐루스Anschluß
독일 국방군의 빈 진격
독일 국방군의 빈 진격

1938년 3월 12일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독일 국방군은 오스트리아 연방으로 진군했습니다. 독일 국방군은 장갑차가 아닌 민간용 자동차를 타고 진군하는 등 별다른 무장을 하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독일 국방군을 환영했고 3월 13일 빈Wien에 도착한 독일 국방군은 빈Wien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에 놀랐습니다. 빈Wien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독일 국방군은 의회의사당으로 진격해 내각을 장악했습니다. 3월 13일 저녁 상심한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는 자진사퇴했고 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은 총리 선출을 거부하며 마지막까지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방군은 내각을 장악한 상태에서 법을 밀어붙여 4월 1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97%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리로 임명한 후 대통령직까지 함께 맡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연방을 지우고 독일국으로 통일했습니다.


  • 국제사회의 방임
안슐루스 이후 지도
안슐루스 이후 지도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연방의 통일(안슐루스Anschluß)는 엄연히 베르사유 조약에 반하는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전쟁을 막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의 폭주를 쉬쉬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국의 오스트리아 연방 병합을 묵인했고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를 전면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안슐루스Anschluß는 그의 도박이었고 국제사회의 제지를 받지 않자 그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후 위대한 게르만이라며 선전을 지속했고 게르만인 민족국가 건립을 명분으로 침공을 지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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