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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대숙청]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숙청

by 롱카이. 2022. 12. 15.
  • 소련 경제발전의 이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1928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1928년 제1차 국민경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소련의 경제개발을 주도했습니다. 스탈린은 관료의 규모를 키워 각 공장과 농장을 관리하는 관청과 관리들을 생성했고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소련 중앙정부의 명을 받아 지방을 지도하는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빠른 경제발전 성과를 원했고 지방끼리 성과 경쟁을 붙였습니다. 이에 지방 관료들의 일부는 성과를 조작해 상부에 보고하고 혜택을 받아갔습니다. 1929년 최대 정적인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하고 소련의 정권을 독식한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국민경제 5개년 계획의 진행상황을 점검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소련 지방관료들의 대부분이 근무태만 상태에 빠져있고 성과는 부풀려졌음을 알았습니다. 공산당원들은 당원증을 국외로 판매해 사비를 챙기고 죽은 당원의 당원증을 가족이 돌려 사용해가면서 공산당원직을 유지하며 심지어는 없는 사람 이름을 지어 당원을 만들고 그 당원의 봉급을 횡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무소의 공산당원들은 출근을 지키지 않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지도 않았으며 실적 보고를 위해 없는 성과를 무작위로 만들어 보고했음이 들어났습니다. 공산당원들의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근무태만의 공산당원들을 공산당에서 축출했습니다.


  •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
세르게이 키로프 묘관과 스탈린
세르게이 키로프 묘관과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1928년 시작한 제1차 국민경제 5개년 계획 중 1929년 제1차 대숙청을 감행했고 이어 5개년 계획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그는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이어지는 제2차 국민경제 5개년 계획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던 중 공산당원이 해이한 상태임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이 터졌습니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스몰니 연구소에서 스탈린의 오른팔이었던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범인은 레오니트 바실리예비치 니콜라예프로 그는 가짜 당원증을 들고다니며 공산당원으로 위장해 연구소의 경비원을 속이고 연구소에 들어가 키로프를 암살했습니다.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에서 암살사건이 발발하자 놀란 스탈린은 1935년 새해 신규당원 유입을 중단하고 소련의 각 지부 당원들의 명단 조사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명단 조사를 담당하던 공산당원들은 근무태만에 빠져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이에 스탈린이 직접 조사한 결과 1929년과 명단이 달라진 점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스탈린이 공산당원 숙청을 명령했는데 지방 지점의 상급 공산당원들은 근무태만 죄를 하급 공산당원들에게 뒤집어 씌워 공산당에서 퇴출시키는 식으로 숙청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스탈린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고 스탈린은 대대적인 숙청을 준비했습니다.


  • 1936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
즈다노프와 스탈린
즈다노프와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지부의 급진파인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를 기용했습니다.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는 유일하게 관료주의 개혁을 외친 인물이었고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그를 주요 요직에 앉혀놓고 함께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것이 1936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지방분권 소비에트 사회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1936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이 등장할 무렵 스탈린 파벌 내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가 나뉘어 파벌싸움을 벌였습니다. 온건파는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암살 사건 이후 불리해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트로츠키파가 단독행위를 하다 숙청당하며 더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결국 내무인민위원회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위원장은 온건파의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에서 급진파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로 바뀌었습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는 소련 지점과 유착한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를 대규모 개혁했습니다. 그는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조직대개편과 중앙화를 진행했고 지방 지점의 근무태만인 공산당원들을 대거 체포 후 숙청했습니다. 지방 지점의 하급 공산당원은 자신에게 죄를 뒤씌운 부패 고위 공산당원을 고발했고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는 그들을 모두 체포한 후 공산당 직위를 해제하고 추방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처형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 대숙청Большой террор
내부인민위원회의 대숙청
내부인민위원회의 대숙청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주도의 숙청이 시작되자 지방 지점의 근무태만 공산당원들이 공산당에서 축출당했고 공산당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치열한 정치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2차 국민경제 5개년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소련에 경제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지역의 혼란을 방임하며 기회를 보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압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1937년 지방의 부패한 고위 공산당원은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중앙정부에 트로츠키주의자, 반동분자라는 공격적 언행을 섞어 중앙정부를 맹비난했습니다. 이들의 행보는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를 도발했고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는 지방 지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명령했습니다.

시베리아 노동수용소
시베리아 노동수용소

공교롭게도 이 때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는 군부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지방 지점의 공산당원만큼이나 군부도 직위를 남용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보급품을 횡령하며 군사 훈련을 하지 않으면서 훈련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기 때문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는 부패한 군부 인사들도 대거 숙청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의 대규모 숙청이 시작되자 희생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지역 공산당을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지역 공산당들을 트로츠키자로 몰아세우며 트로츠키의 지령을 받아 소련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하고 외국 첩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소련 공산당 내부는 숙청을 진행하는 세력과 숙청당하는 세력이 서로를 반동분자라고 맹비난했고 이를 진지하게 믿었습니다. 결국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는 숙청해야 할 대상을 찾지 못했고 1937년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는 명확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선동에 따라 숙청을 진행했습니다. 내부인민위원회는 사람들이 지목하거나 의심이 가는 인물은 무조건 체포해 고문을 가해 반동분자임을 불게 하고 처형하거나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ГУЛаг로 축출했습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심문을 받는 여성
내무인민위원회의 심문을 받는 여성

의심만 가면 무조건 숙청하는 공포의 대숙청Большой террор 동안 공산당원과 군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과 기술인, 농민 등 공산당원 외 사람들도 의심되면 바로 숙청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소수민족은 루스인에게 의심을 받았고 대규모 대숙청당했습니다.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핀란드인은 동유럽 본국의 첩자로 의심받아 대규모 처형당했고 체첸인과 인구시인, 타타르인 등 캅카스Кавка́з 지역의 사람들, 유대인은 소비에트에 반항한다는 이유로 숙청당했습니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일본제국의 첩자로 의심받아 일본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고려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는 1937년부터 1938년 수많은 사람들을 명확한 이유없이 숙청했고 소련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 예조프 숙청으로 끝난 대숙청
기록말살형을 당한 예조프
기록말살형을 당한 예조프

1937년 중반부터 시작된 대숙청Большой террор은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의 폭주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도 막을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났고 내부인민위원회НКВД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의 명령에 움직였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급격히 부상한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를 경계했고 1938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가 광기에 사로잡혀 대숙청Большой террор으로 수많은 인재들을 처형했음을 알았습니다. 이 때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국은 전쟁을 준비하며 세계의 위협이 되고 있었고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독일국에 대항해 소련의 국력을 보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는 1938년 11월 25일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를 해임시킨 후 1939년 3월 18차 전연방 공산당 당대표에서 공산당원 탈퇴를 선언받았고 그의 일가족은 체포되어 고문받다 처형당하고 그는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대숙청을 주도한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는 이렇게 몰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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