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이 사라진 자리
제1차 세계대전의 명분은 민족주의였습니다. 민족국가는 자국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며 타민족을 진압할 것을 호소하며 전쟁에 참전했고 다민족 제국은 상대 제국을 붕괴시키고 민족을 독립시켜 제국을 분할하려고 했습니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이 이 전략을 서로에게 적용해 적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슬라브인을 해방하고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을 해방하는 것을 명분으로 공격했습니다. 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폴란드 독립을 명분으로 러시아 제국을 공격했고 오스만 제국은 튀르크 해방을 주장하며 러시아 제국 내 튀르크 민족 독립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세 제국은 전쟁으로 멸망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유럽 중부 다민족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국주의 물결 속에서도 다민족 체제를 지켜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문 휘하의 제국을 지향했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근면성실한 국정운영으로 제국 내 신민과 외국인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16년 11월 26일 프란츠 요제프 1세 서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제국에 더 강하게 종속되었습니다. 1918년 10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급속도로 붕괴되었고 민족주의 국가로 분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우드로 윌슨의 희망과 달리 신생 국가들은 서로 영토전쟁을 벌였습니다. 민족 영역의 개념은 모호해 여러 민족이 한 지역에 같이 사는 경우가 많았고 신생국들은 이를 명분으로 서로 침공하며 전쟁을 벌였습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사라진 자리에 한동안 포성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국가는 예전부터 정체성이 정해진 국가로 혼란이 빠르게 진압되었습니다.
- 러시아 해체 이후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마지막 통제 권력이 사라지자 러시아는 빠르게 해체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다민족을 흡수해온 러시아는 너무나 많은 민족이 존재했습니다. 동맹국은 이를 잘 알았고 러시아 구심점이 사라지자 민족주의를 외치며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해체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튀르크 민족주의를 외치며 아제르바이잔과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등 튀르크 국가 건립을 지원했고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핀란드 대공국, 폴란드 입헌왕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발트연합공국 등을 건국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내 국가들은 오랜 지배 하에 영역이 불분명했고 때문에 독립 이후 명확한 영토가 없어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캅카스Кавказ 지역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험준한 캅카스 산맥은 수많은 민족이 좁은 캅카스 산맥 내 출현하는 환경을 만들었고 캅카스Кавказ 지역에 수많은 민족이 서로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이를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카자르 제국 세 제국이 캅카스Кавказ를 분할해 지배하면서 민족 간 갈등을 잠재웠습니다. 때문에 캅카스 지역은 오랫동안 민족보다는 군주에 더 집중하며 타민족끼리 활발하게 교류했고 때문에 민족 영역이 사라진 상태로 서로 왕래했습니다. 그 환경에서 갑자기 민족영토를 분할하는 상황이 닥쳐오니 대혼란이 찾아왔습니다. 특히 이웃집에 살며 가까이 지내온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하루아침에 남이 되었고 민족주의 광풍이 찾아오자 서로 인종청소를 자행했습니다. 둘은 민족경계가 없는 상태에서 남캅카스 지역을 점령하고자 서로 학살해 제거하려고 했고 불구대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금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 오스만이 떠난 자리
중동 핵심지역을 책임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오스만 제국이 범튀르크주의를 외치며 아나톨리아 반도의 타민족을 인종청소했습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고 튀르키예 독립전쟁으로 튀르키예 공화국이 세워지며 튀르키예 공화국은 튀르크 민족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엘라다 왕국으로 쫒겨났고 쿠르드인들은 국가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아랍인의 영토가 강제 분할된 것이었습니다. 후세인 빈 알리가 원하던 아랍 영토는 헤자즈 왕국과 시리아 아랍 왕국으로 시리아السورية와 헤자즈الحجاز는 아랍인들이 전통적으로 이용하던 영역이었습니다. 아랍인은 지역을 시리아와 헤자즈로 구분했고 시리아السورية, 헤자즈الحجاز 각 지역 전체가 그들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이를 무시하고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을 난도질했습니다. 추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볼셰비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폭로해 탄로났고 중동 분할 문제는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라 분할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은 헤자즈الحجاز 지역은 후세인 빈 알리의 재량에 맡기고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과 메소포타미아الرافدين 지역을 위임통치령으로 정해 지배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 분할안은 아랍인의 영역 개념에 부합한 분할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이 스페인 독감에 걸려 중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은 영토를 마음대로 분할했습니다. 새로 결정된 영역은 아랍인의 영역 개념에서 벗어났고 과대하게 넓어진 영역은 수니파와 시아파가 같은 영역 안에 공존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리아السورية 지역을 여러 구역으로 난도질해 시리아السورية에 살던 사람들은 갑자기 국경이 여러 개 생겨 생활에 지장이 생겼습니다. 아랍인의 영역을 무시한 새 영토는 여러 민족이 한 위임통치령 내에 같이 살게 만들었고 그들의 터전을 이상하게 분할했습니다. 때문에 위임통치령 내의 민족과 부족은 서로 갈등을 벌였고 몇몇은 새로 생긴 국경으로 생이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중동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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