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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8월 4일 체제] 그리스 전체주의

by 롱카이. 2022. 12. 8.
  • 엘라다 혼란
1922년 9월 11일 혁명
1922년 9월 11일 혁명

그리스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자마자 오스만 제국으로 군대를 파병하며 메갈리 이데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 제국을 전복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한 후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쫒아냈습니다. 1922년 하반기 그리스군은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했고 의미없는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그리스군은 이미 진 전쟁을 계속하는 엘라다 정부에 반발했고 쿠데타를 준비했습니다. 그리스군은 1922년 9월 11일 혁명을 일으켜 콘스탄티노스 1세를 폐위하며 왕정을 전복했습니다.

튀르키예 독립전쟁 그리스군
튀르키예 독립전쟁 그리스군

그리고 엘라다 왕국은 1923년 10월 기어코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거기에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으로 튀르키예 공화국은 튀르키예 공화국 내 엘라다인을 모두 엘라다 왕국으로 추방했고 엘라다 왕국은 오랜 기간 튀르크화된 엘라다인을 수용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엘라다 왕국으로 유입되자 엘라다 왕국은 좁은 영토에 너무 많은 인구와 다른 문화로 충돌이 발생했고 사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 엘라다 제2공화국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오우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오우

1923년 12월 16일 엘라다 총선이 열렸고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오우가 총리로 당선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오우는 폐위된 알렉산드로스 1세에게 해외로 떠날 것을 권유했고 알렉산드로스 1세는 해외로 떠났습니다. 그 후 그는 1924년 3월 25일 엘라다 제2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엘라다 제2공화국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엘라다 제2공화국은 엘라다 공산당을 견제해야 했고 이탈리아 왕국은 케르키라Κέρκυρα 섬을 계속 노렸으며 1925년 10월에는 국경을 넘은 개 한마리 때문에 불가리아 차르국과 유혈 사태를 낸 페트리치 사건에서 패배하며 국격을 깎았습니다.


  • 반복되는 쿠데타
엘라다 국가사회주의당
엘라다 국가사회주의당

결국 1925년 6월 테오도로스 판갈로스 육군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를 실시했지만 약 1년만에 해임하며 다시 공화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발발했고 엘라다 제2공화국은 농업작물을 수출하지 못해 빈곤해졌습니다. 이에 엘라다 공산당이 다시 득세했고 공산당을 막으려고 우익 정당들이 등장했습니다. 우익 단체들 중 군인 출신이 많았고 이들은 공산당의 득세를 군사력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일부는 파시즘을 받아들였고 1932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모방한 엘라다 국가사회주의당도 등장했습니다.

1935년 쿠데타
1935년 쿠데타

1933년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사전 진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군부는 다시 한번 쿠데타를 준비해 1935년 3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니콜라오스 플라티라스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군부를 억압해 쿠데타가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막았습니다. 니콜라오스 플라티라스 군부가 강성해지자 게오르기 2세는 니콜라오스 플라티라스를 해임하고 새로운 정치인들을 요직에 앉혔습니다.


  • 8월 4일 체제Καθεστώς της 4ης Αυγούστου
8월 4일 체제
8월 4일 체제

군부의 폭정을 겨우 진정시킨 새 정치인들은 1936년 총선을 열었는데 엘라다 공산당이 꽤 득세했습니다. 이에 놀란 엘라다 우익 정치인들은 공산당을 막기 위해 파시즘을 수입했습니다. 극우 정치인이었던 이오안니스 메타사스는 그동안 이끌었던 자유인당Κόμμα των Ελευθεροφρόνων을 운영하며 그만의 정치철학인 메타스주의를 확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라다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메타스주의를 널리 알렸고 1936년 8월 4일 체제Καθεστώς της 4ης Αυγούστου를 수립했습니다.

이오안니스 메타사스
이오안니스 메타사스

메타스주의와 8월 4일 체제Καθεστώς της 4ης Αυγούστου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가 실현한 파시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파시즘은 아니었고 국가 최우선 이념을 우선시하는 전체주의 체제였습니다. 8월 4일 체제Καθεστώς της 4ης Αυγούστου는 민족주의를 강하게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비잔티움 제국의 후예임을 강조하며 제3 엘라다 시민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문화 검열을 강화하며 체제에 반하는 인사는 가차없이 체포하며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해 이오안니스 메타사스를 신격화했습니다. 엘라다 제2공화국은 8월 4일 체제Καθεστώς της 4ης Αυγούστου로 모든 것을 통제한 전체주의 국가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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