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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이라크 하심 왕국] 이라크 문제 시발점

by 롱카이. 2022. 12. 12.
  • 아랍 영웅 파이샬 1세
이라크 종교-민족 분포
이라크 종교-민족 분포

무함마드가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직후 아랍 민족은 수세기 동안 부족 단위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아랍인은 기독교를 믿었고 어떤 아랍인은 이슬람을 믿었습니다. 더 세분화하면 로마 가톨릭 신자, 정교회 신자, 콥트교 신자, 수니파, 시아파 등으로 나뉘었고 심지어 일부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랍 민족은 애초에 아라비아ٱلسُّعُوْدِيَّة 반도와 마스르مَصْر(이집트)에 살던 사람들을 묶어 표현한 민족으로 수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싸잡아 편리하게 아랍인이라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랍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 조금 무리가 있는 민족주의 개념이었습니다. 이는 이라크 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이살 1세
파이살 1세

하지만 아랍 민족주의자 파이살 1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랍인이 튀르크인과 유럽인에게 지배받지 않으려면 아랍 민족국가를 건국해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무모하게 아랍 민족주의를 강조하지는 않았고 부족과 종교를 넘어 알라الله 아래 모두가 같은 형제임을 강조했습니다. 1921년 이라크 왕국의 국왕이 된 파이살 1세는 쿠르드족, 수니 아랍 부족, 시아 아랍 부족을 알라الله께 신실한 형제라고 강조하며 규합하려고 했습니다.


  • 대영제국의 이라크 교란
이라크 왕국 영국군
이라크 왕국 영국군

하지만 이라크 왕국을 간접 지배한 대영제국은 파이살 1세가 이라크 왕국의 민중을 하나로 통일하고 자신들에게 대항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이라크 하심 왕국 내 분열을 유도했습니다. 이라크 왕국은 전제군주제 왕국이었지만 위임통치령이었으므로 파이살 1세보다 영국인 정치인이 인사권을 우선 갖는 등 영향력이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 정치인들은 이라크 왕국의 주요 민족이 시아파 아랍인 부족임을 확인한 후 일부러 쿠르드와 수니파 아랍인 부족에게 특권을 제공했습니다. 그 와중에 쿠르드인이 봉기를 일으키자 시아파 아랍인에게 쿠르드인 진압을 유도했습니다. 그 결과 시아파 아랍인, 수니파 아랍인, 쿠르드인은 서로를 증오했고 이라크 왕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 이라크 하심 왕국
튀르키예 공화국이 요구한 영토
튀르키예 공화국이 요구한 영토

대영제국은 1922년 이라크 왕국을 건립한 후 모술 문제로 튀르키예 공화국과 오랫동안 갈등을 벌였습니다. 로잔 조약 이후로도 튀르키예 공화국은 모술ܢܝܢܘܐ이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은 튀르크 민족과 쿠르드 민족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쿠르드인이 대부분 거주하는 모술ܢܝܢܘܐ은 민족주의 영토에 따라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라크 왕국이 차지한 모술ܢܝܢܘ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봉기를 진압하러 출동하는 대영제국 왕립 항공대 폭격기
봉기를 진압하러 출동하는 대영제국 왕립 항공대 폭격기

이에 대영제국은 튀르키예 공화국을 포위하며 압박했고 1926년 앙카라 조약으로 모술ܢܝܢܘܐ을 이라크 왕국으로 선포하는 국경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1927년 모술ܢܝܢܘܐ에서 대규모 유전지대가 발견되자 튀르키예 공화국에 모술ܢܝܢܘܐ 석유 생산으로 얻은 이익 일부를 제공했고 튀르키예 공화국은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대영제국은 이라크 왕국을 지배하며 유전지대를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대영제국의 지배에 반발했고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반영 독립투쟁을 수행하며 대영제국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대영제국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영국군 피해도 늘어갔습니다.

이라크 하심 왕국
이라크 하심 왕국

결국 누적된 피해에 대영제국은 백기를 들었고 1932년 10월 3일 이라크 왕국을 이라크 하심 왕국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국왕 파이살 1세는 국권을 얻었고 완전 독립국의 국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허나 이라크 하심 왕국의 초대 국왕인 파이살 1세는 이미 고령이었고 1933년 서거했습니다. 그리고 가지 이븐 파이샬이 그 뒤를 이어 국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허나 대영제국 정부는 1932년 이라크 하심 왕국 독립을 선언한지 1년이 넘은 시점에도 영국군을 철군시키지 않았습니다.


  • 사실상 식민지였던 독립국
이라크 하심 왕국 가지 국왕
이라크 하심 왕국 가지 국왕

가지 이븐 파이살 국왕은 문맹으로 정계에 매우 무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무지했고 아랍 민족주의, 이라크 민족주의에 대해 관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대영제국에게 보호해줄 것을 요구했고 대영제국 정부는 가지 이븐 파이살 국왕 보호를 명분으로 영국군을 철수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문관을 파견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 하심 왕국을 영국인 정치인이 지배하게 했습니다. 또한 하심 가문이 수니파라는 점을 이용해 일부러 수니파 아랍인만 정계에 앉혀 다른 민족을 탄압하게 만들었습니다.


  • 막장 국가
이라크 하심 왕국 아시리아인
이라크 하심 왕국 아시리아인

1933년 아시리아인들이 정부에 항의하자 대영제국 정부는 이라크 하심 왕국이 아시리아인 학살을 일으키게 유도했습니다. 이라크 하심 왕국 정치인과 군대는 모두 수니파 아랍인으로 총리였던 야신 알하시미는 수니파 극단주의자로 수니파를 제외한 자들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는 이교도를 벌한다며 시멜레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935년 모술ܢܝܢܘܐ에서 쿠르드인 부족이었던 야지드 부족이 반정부 봉기를 일으키자 그들도 학살했습니다. 이라크 하심 왕국의 폭정이 이어지자 1935년 이라크 하심 왕국 중심지에서 시아파 아랍 부족들이 대규모 연쇄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이라크군은 전투기까지 동원해 그들을 학살하고 체포하며 강경진압에 나섰습니다.

야신 알하시미
야신 알하시미

이렇게 매번 폭력 사태가 발발하며 이라크 하심 왕국은 막장으로 치달았습니다. 그 와중에 바르크 시드키 알아스카리 장군은 권자를 탐내 1936년 쿠데타를 일으켜 야신 알하시미 총리를 폐위하고 즉위했습니다. 이에 야신 알하시미 총리는 1937년 그를 암살하고 다시 총리에 앉았습니다. 또한 대영제국 정부는 너무도 무능한 가지 이븐 파이샬 국왕이 필요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939년 가지 이븐 파이샬 국왕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대영제국 정부의 음모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이라크 하심 왕국은 파이살 1세 서거 이후 막장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이라크 하심 왕국 내 민족-종교 갈등은 해결 불가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이라크 문제로 남아 이라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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