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아메리카 패권국 아르헨티나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자유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유럽과 미국으로 밀, 가공육, 양모, 깃털, 가죽, 유제품을 판매하며 높은 무역 흑자를 얻었습니다. 또한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드넓은 평원을 가진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농업-목축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며 독일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등 유럽인들이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 이주해 인재를 유입했습니다. 그 덕분에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경제성장률이 높은 국가가 되었고 남아메리카 패권국 지위에 도전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국가재정의 상당수를 군사력에 투자해 아르헨티나군을 양성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해 군대 질을 향상시켰고 아르헨티나 공화국 영토를 확장하며 전쟁을 함으로서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더불어 칠레 공화국, 브라질 합중 공화국과 경쟁했고 유럽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수입해 해군력을 강화했습니다.
- 후안 이폴리토 델 사그라도 코라손 데 예수스 이리고옌
19세기 동안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공화국이지만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공화국 이념에 어긋나는 행위였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급진시민연합Unión Cívica Radical은 헌법을 개정해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총선으로 대통령을 뽑았고 급진시민연합Unión Cívica Radical 진영에서 당수 이폴리토 이리고옌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는 총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45%의 득표율을 보이며 불안한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발전을 위해 농공업 산업을 육성했고 새로운 수출시장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미합중국이 힘이 강대하다는 현실을 빠르게 파악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미합중국이 남아메리카에 반동맹국 노선을 유지하라고 엄포하자 그는 이를 따랐습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독일계 시민들은 반발했지만 국익이라는 좋은 명분 앞에 힘을 잃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는 대학을 설립하고 교육을 활성화했으며 노동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켰습니다. 또한 전후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양의 밀과 가공육, 유제품을 판매해 유럽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했고 막대한 흑자를 냈습니다. 그 덕분에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세계의 곡물창고라고 불렸으며 40% 경제성장률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1917년 전세계로 공산주의 혁명이 퍼지자 아르헨티나 공화국에도 아르헨티나 국지 노동 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또한 1919년 1월 아나키즘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통령은 육해군을 파병해 그들을 일주일 만에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살에 가까운 강경 진압이 일어났고 이를 비참한 일주일Semana Trágica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1920년 아나키즘 운동은 불붙듯이 퍼졌고 1921년 아나키즘 운동에 반발해 반혁명 운동이 퍼졌습니다. 반혁명 운동의 대부분은 파시즘 운동이었고 군사독재로 강력하게 통제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 혼란의 상황 속에서 이폴리토 이리고옌은 임기가 끝나 1922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 악명 높은 십년Década Infame
1928년 다시 총선이 열렸고 이폴리토 이리고옌은 출마해 다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노동자 복지를 강화하며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고 아나키즘 운동으로 생긴 혼란상을 안정시키려고 했습니다. 허나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고 아르헨티나 경제 성장률은 바닦을 찍었습니다. 이에 민족주의 세력Nacionalismo이 결성한 준군사조직인 아르헨티나 애국 연맹Liga Patriótica Argentina이 지원하는 군대가 1930년 9월 6일 1930년 쿠데타를 일으켜 이폴리토 이리고옌을 추방하고 부정선거로 자기들끼리 권력을 나눠가졌습니다.
군부와 극우주의 세력은 아나키즘,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자 이들을 전면 탄압했고 부정선거로 아나키즘, 공산주의 정권에게 의석을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반항이 일어나면 군대를 보내 이들을 학살했습니다. 기득권은 협동조합주의로 파시즘 국가성장을 시도했으며 유럽 파시스트 국가를 모방해 군대로 국민을 억압했습니다. 때문에 아르헨티나인들은 이 암울한 시기를 악명 높은 십년Década Infame이라고 부르며 혐오했습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군부 독재라는 혼란과 억압의 시대가 지나며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피폐해졌습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 GDP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14% 감소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후퇴했지만 다행히 영웅이 있었습니다. 1932년 총선에서 대통령이 된 아구스틴 페드로 후스토 롤론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지만 아르헨티나 국가를 생각하는 참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주의 경제를 채택해 경제 자유화를 꾀했습니다. 그는 1933년 3월 1일 대영제국과 로카-룬시먼 조약을 맺어 대영제국에 아르헨티나 소고기를 대량 수출하며 대영제국의 막대한 융자를 얻어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 융자로 얻어낸 자본으로 공업화를 시작하며 수입대체 산업화를 꾀했습니다. 이로 유럽에서 공산품을 수입해야 했던 아르헨티나 공화국을 공산품을 스스로 생산해 내수시장을 활성화하고 해외로 공산품을 수출해 농업보다 더 많은 국가 이윤을 창출했습니다. 1933년 시작된 수입대체 산업화는 1930년대 말 효과를 보기 시작하며 아르헨티나 공화국 경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남아메리카에서 공업 인프라와 기술을 가장 잘 갖춘 국가로 성장했고 유럽과 미국의 주목을 받아 투자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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