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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전쟁으로

[더 큰 전쟁으로: 버마 분리운동] 버마는 인도와 다르다

by 롱카이. 2022. 12. 12.
  • 인도제국
인도제국
인도제국

미얀마 역사상 최전성기를 달렸던 꼰바웅 왕조는 팽창주의 정책 때문에 인도제국과 자주 충돌했습니다. 19세기 대영제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국가들을 정복하며 인도제국을 건설했고 꼰바웅 왕조도 눈여겨 보았습니다. 대영제국 동인도회사는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허약함을 확인하자 청나라를 포위하려고 꼰바웅 왕조를 공격해 인도제국에 편입시켰습니다. 대영제국 동인도회사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낮은 남부를 확보해 영국군 병력을 바로 윈난성元南省으로 파병할 수 있는 기지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꼰바웅 왕조의 신민들은 인도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인도제국에 속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자치권이 주어진 인도제국 일부 지역과 달리 버마는 전체가 직접 지배를 받으며 수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대영제국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버마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
청년불교협회
청년불교협회

버마 독립운동을 처음 시작한 단체는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였습니다. 인도제국에 속하기 전 버마는 꼰바웅 왕조 시대로 동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었던 꼰바웅 왕조는 수많은 민족을 흡수했습니다. 꼰바웅 왕조에는 버마족, 친족, 까칭족, 까잉족, 까야족, 몬족, 야카잉족, 샨족이 주류 민족이었으며 그 외에도 100개 이상의 민족이 혼재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꼰바웅 왕조를 거쳐 영국령 버마 영토에서도 혼재했고 지식인들은 민족주의로는 이들을 뭉치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불교 아래 민족이 뭉쳐 반영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1906년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를 설립했습니다.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대영제국이 혼란에 빠진 1916년 처음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인도제국과 버마ဗမာ가 다름을 외치며 버마ဗမာ를 인도제국에서 분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대영제국 정부에 로비를 하며 영국령 버마 분리를 요구했습니다.

청년불교협회 협회기
청년불교협회 협회기

그러던 중 1920년 랑군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영국령 버마를 인도제국에게서 분리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단체 휴학, 파업으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는 버마 분리를 원하는 학생들이 있으며 이것이 버마인들의 요구임을 확인하고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를 스스로 해체한 후 새 단체로 더 향상시켰습니다.


  •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
버마협회총회
버마협회총회

청년불교협회ဗုဒ္ဓဘာသာကလျာဏယုဝအသင်는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로 한단계 발전시켰고 버마 분리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칫 흐라잉, 우 푸, 우 카우 둔 등 여러 지식인들이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를 이끌었고 대영제국 정부에게 영국령 버마 분리를 끊없이 요구했습니다. 1922년 대영제국 정부는 영국령 버마를 인도제국에서 분리시키겠다고 선언하며 11월 선거로 어떻게 분리할지 결정하자는 의견을 보냈습니다.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는 이에 동의하며 영국령 버마 분리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분리안을 두고 의견차를 보였고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는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1922년 선거는 흐지부지 되었고 1925년과 1932년 선거에서 그들은 더 분열되며 1932년 이후 작은 정당들로 소분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령 버마 분리는 계속 연기되었습니다.


  • 대학생 연합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ဂ
대학생 연합
대학생 연합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가 영국령 버마 분리를 자꾸만 지연시키자 버마 대학생들은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30년 9월 20일 대학생 연합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ဂ을 설립해 그들이 직접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그들은 랑군 대학교와 랑군(현 양곤ရန်ကုန်) 전역에서 시위를 일으켰고 버마협회총회ဂျီစီဘီအေ 출신 정치인들은 대학생 연합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 학생 시위로 정신을 차렸습니다.

1937년 인도제국과 영국령 버마
1937년 인도제국과 영국령 버마

우 바 페를 중심으로 버마협회총회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에서 분리된 여러 정당은 다시 힘을 합쳐 버마협회총회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를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버마협회총회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는 1936년 선거에서 여당이 되었고 영국령 버마 분리 계획을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그 덕분에 1937년 연초 대영제국은 영국령 버마와 인도제국을 분리했습니다.


  • 1938년 대학생 시위
학생연합전버마연합
학생연합전버마연합

대학생 연합တက္ကသိုလ် ကျောင်းသားများ သမဂ္ဂ은 영국령 버마 분리를 외쳤지만 단순히 분리에 만족하지 않고 버마 독립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랑군 대학생들은 1936년 5월 학생연합전버마연합ဗမာနိုင်ငံလုံးဆိုင်ရာကျောင်းသားသမဂ္ဂများအဖွဲ့ချုပ်을 설립했습니다. 대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며 사회주의가 제국주의를 무찌르고 독립을 가져다줄 사상이라고 생각했으며 사회주의 정당들을 창립해 반영 독립운동을 진행했고 1936년 5월 아웅 산을 중심으로 학생연합전버마연합ဗမာနိုင်ငံလုံးဆိုင်ရာကျောင်းသားသမဂ္ဂများအဖွဲ့ချုပ်을 설립해 버마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1937년 대영제국은 영국령 버마를 인도제국에서 분리했지만 인도제국 개혁에서 영국령 버마를 제외하며 보복했고 대학생들은 이에 항의했습니다.

1938년 대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영국군
1938년 대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영국군

1938년 4월 25일 대학생들이 다시 모여 그들의 의지를 확인했고 1938년 대학생 시위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성명서를 작성해 계획을 명시화했습니다. 그 후 1938년 12월이 시작되자 대영제국 버마 석유회사에서 노동자와 함께 시위를 시작해 랑군 대학교로 행진하고 대영제국 사무국 앞에서도 시위를 열었습니다. 승려들도 대학생들의 의지를 지지하며 시위대에 가담해 대영제국 정부에 항의했습니다. 랑군 대학교 외에도 만달레이 대학교 등 전국 대학교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대영제국 정부는 군대를 보내 이들에게 발포하고 폭행한 후 체포하는 등 무력 진압했습니다. 1938년 12월 20일에는 보 아웅 캬우 랑군 대학교 학생이 사망했고 시위대는 분노하며 더 큰 시위로 응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영제국은 끄떡하지 않았고 분노한 학생과 독립운동가들은 대영제국을 몰아낼 수 있는 외세를 찾았습니다. 그 외세는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자랑하는 일본제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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