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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서부전선

[서부전선: 제3차 이프르 전투] 브뤼허로 가는 길

by 롱카이. 2022. 2. 4.
  • 벨기에 독일제국 해군 군항을 점령하라

케렌스키 공세 이후 유럽
동부전선 케렌스키 공세 이후 지도

니벨 공세의 실패로 프랑스군은 한동안 공세를 하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서부전선의 독일군 역시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서부전선 독일군은 니벨 공세를 막아내느라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고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케렌스키 공세로 매섭게 몰아붙이다 밀려나 후퇴했고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후퇴하는 러시아군 뒤를 맹렬하게 뒤쫒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거의 확정된 상황으로 독일군 군부는 동부전선을 빠르게 종결하기 위해 마지막 총공격에 나섰습니다. 때문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뒷전이었고 독일군의 주력부대와 주요 물자는 동부전선에 집중되었습니다. 때문에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열약한 환경에서 참호선에 머물며 전선을 지켜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브뤼허 항구 독일제국 잠수함
브뤼허 항구의 독일제국 잠수함

더글러스 헤이그 영국원정군 총사령관은 이 상황을 서부전선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는 벨기에 해안에
있는 독일제국 해군 항구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독일제국 해군 잠수함을 정박하는 독일제국 해군 항구들을 공격해 점령하면 영토 탈환과 독일제국 해군 잠수함 운용방해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세한 목표를 밸기에 브뤼허Bruges 항구로 잡았습니다. 브뤼허Bruges 항구는 독일제국 해군이 잠수함과 전함을 정박하는 항구 뿐만 아니라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가는 주요 철도역 중 하나가 브뤼허Bruges 철도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에게 브뤼허Bruges 상실은 치명적이었습니다.


  • 후스 작전

제1차 세계대전 후스 작전
후스 작전

더글러스 헤이그 영국원정군 총참모장은 브뤼허Bruges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는 작전을 후스Hush 작전이라고 불렀고 작전을 대영제국 전시내각에게 소개했습니다. 후스 작전은 육군과 해병대의 합동작전이었습니다. 영국원정군 육군은 이프르Ypres의 약한 참호를 뚫고 브뤼허Bruges로 진격하고 영국원정군 해병대는 뉴포르Nieuport에서 이제르Yres에 이르는 해안선에 상륙해 벨기에 북부를 완전히 차지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력 공세는 육군의 이프르Ypres 돌파였습니다.

제3차 이프르 전투 계획도
제3차 이프르 전투 계획도 (황토색: 실제 전투지역)

수많은 영국원정군 사령관들은 이 작전이 무모하다며 걱정했지만 자신감에 눈이 먼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은 이의를 무시하고 대영제국 전시 내각을 설득했습니다.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은 작전을 성공시켜 자신의 유능함을 알려 자신을 불신하는 대영제국 전시내각이 자신을 믿도록 바꾸고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프랑스군을 도와 작전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 본인이 직접 작전을 세우고 서부전선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후스 작전은 그의 목적을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 메신Messines 전투

서부전선 메신 능선 방어선
메신Messines 능선 방어선

더글러스 헤이그 총참모장은 본격적으로 후스 작전을 시행하기 전 메신Messines 능선을 먼저 차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메신Messines 능선은 연합군 참호 앞 능선으로 독일군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메신Messines 능선에서 연합군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었고 만약 연합군이 참호 밖으로 나가 브뤼허Bruges로 진격한다면 메신Messines 능선 위 독일군들이 연합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바로 야포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은 후스
작전을 하기 전 먼저 메신Messines 능선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3차 이프르 전투 메신 능선
메신 능선

허나 메신Messines 능선은 공략하기 까다로운 곳이었습니다. 메신Messines 능선은 고지대 기지였기 때문에 영국원정군은 능선을 기어오르며 싸워야 했고 독일군은 고지 위에서 영국원정군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어 압도적으로 독일군에게 유리한 고지였습니다. 거기에 독일군은 콘크리트 참호를 건설하며 메신Messines 능선 참호의 방어력을 향상시켜 영국원정군의 포격으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915년 영국원정군이 포격 후 보병 돌격 전술로 메신Messines 능선을 공격했다가 영국원정군만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원정군은 메신Messines 능선에 폭파지뢰를 설치해 아래에서 폭파해 능선 위 독일군 기지를 날려버린다는 전락을 세우고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제3차 이프르 전투 폭약 지뢰
폭파 지뢰 폭파와 돌격하는 영국원정군

영국원정군은 1915년 중순부터 광부들과 공병대대를 대거 투입래 갱도를 파 메신Messines 능선 밑으로 접근한 뒤 대량의 폭파지뢰를 매설했습니다. 독일군은 예전부터 메신Messines 능선 아래에 폭파지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메신Messines 능선 아래 21곳에 막대한 양의 폭약을 묻었고 더글러스 헤이그 총참모장의 명에 따아 1917년 6월 7일 폭파 지뢰를 폭파했습니다. 그 중 2곳은 불발이었지만 19개의 폭파지뢰가 성공적으로 터져 메신Messines 능선을 완전히
날렸습니다. 영국원정군은 폭파지뢰를 터뜨린 뒤 탄막 이동전술로 메신Messines 능선을 천천히 앞에서부터 폭격해 초토화시켰습니다. 그 후 영국원정군 보병이 진격했고 적은 피해로 메신Messines 능선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2만명의 병력을 폭파지뢰 폭발로 잃었습니다.

이프르 농장의 폭약지뢰 흔적
폭파 지뢰 폭발로 생긴 거대한 구덩이

영국원정군은 6월 초에 방해물을 제거했고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은 영국군, 캐나다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뉴질랜드군, 뉴펀들랜드군, 남아프리카군, 영국령 로데시아군, 인도제국군을 모아 제5군을 편성해 세번째 이프르Ypres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 초기 공세와 폭우

제3차 이프르 전투 랑에마르크 전투
랑에마르크 전투

7월 말 영국원정군은 이프르Ypres 주변 고지들을 먼저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겔루벨트Gheluvelt 능선, 70고지, 랑에마르크Langemark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이 고지들은 독일군이 철저하게 방어선을 구축한 고지로 수많은 포대와 기관총 진지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독일군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구시대 방식인 대량 포격과 보병 대거 투입 전술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참호 돌파를 위해 육상전함Tank이, 정밀 폭격을 위해 폭격기들이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량 포격과 보병 일제 투입 작전은 수많은 영국원정군 병사들을 소모시키는 작전이었지만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은 작전성공을 위해 수많은 병사들을 가차없이 소모시켰습니다. 7월 31일 영국원정군은 기세좋게 점령 작전에 들어갔지만 독일군의 강한 반격에 70고지를 제외한 나머지 곳들은 성공적으로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8월 자주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영국원정군의 발을 묶었습니다. 때문에 영국원정대는 8월 공세를 중단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1917년 베르됭 전투
1917년 베르됭 전투 작전지

그 사이 프랑스군도 베르됭Verdun의 독일군 참호를 공격해 이프르Ypres의 영국원정군을 지원했습니다. 베르됭Verdun 공격은 점령작전이 아닌 소규모 공격이었지만 이프르Ypres에 집중한 독일군 서부전선 부대는 베르됭Verdun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9월 이프르Ypres 지역에 폭우가 걷히자 영국원정군은 다시 한번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겔루벨트Gheluvelt를 다시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전략을 수정해 공격했지만 독일군은 방비를 강화하 영국원정군을 상대했습니다. 독일군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명령으로 독일군은 최전선 참호선의 방비를 강화하고 더 많은 기관총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독일군은 전투가 시작되면 몰려오는 영국원정군에게 기관총 포화를 집중했고 가스탄을 발사해 원거리 가스탄 공격을 하면서 무인지대에서 영국원정군을 소탕했습니다. 허나 영국원정군은 보병을 대거 투입해 독일군 참호선을 빠르게 점령해갔고 영국원정군의 인해전술에 독일군은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메닌Menin 능선로 전투와 폴리곤Polygon 숲 전투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때문에 독일군은 인해전술로 밀고들어가는 영국원정군을 막기 위해 독일군 보병들을 참호 최전방에 배치하는 구식 방어 전술을 다시 한번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전방에 배치된 독일군은 영국원정군의 야포 포격과 항공폭격으로 수많은 병력을 잃었습니다.

제3차 이프르 전투 겔루벨트 전투
진창이 된 겔루벨트 전쟁터

독일군은 9월 25일 반격에 나섰고 반격이 성공해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에 독일군은 9월 30일에 대대적인 반격에 돌입했습니다. 독일군은 허리케인 폭격 후 바로 스투름트루펜을 투입해 영국원정군이 차지한 최전방 참호들을 탈환하려 했지만 영국원정군이 신속히 반격해 독일군을 점령지에서 몰아냈고 영국원정군은 이어 독일군이 차지하고 있던 겔루벨트Gheluvelt를 다시 공격했습니다. 독일군은 반격 실패로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영국원정군은 병력을 투입하며 그동안 수차례 공격해도 점령하지 못했던 겔루벨트Gheluvelt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제3차 이프르 전투 버려진 전차
진창이 된 폴카펠

영국원정군은 10월에 마저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영국원정군은 1917년 10월 9일 독일군이 있는 폴카펠Poelcappelle을 공격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독일군 참호들을 돌파한 기세를 이어 공세에 나섰으나 독일군이 아닌 다른 것이 영국원정군을 가로막았습니다. 1917년 10월 3일 플란데런Flandre에 폭우가 내려 땅이 진흙탕이 되었고 영국원정군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진흙탕은 공격하는 보병 뿐만 아니라 포격 지원을 할 야포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영국원정군은 안젝Anzac(오스트레일리아군과 뉴질랜드군)을 보내 참호를 점령하게 했지만 뻘에 발이 빠진 병사들은 독일군 기관총 포화에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영국원정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허나 영국원정군의 공세 실패 전보는 사령부로 잘못 전해졌고 통신도 원활하지 않아 영국원정군 사령부는 공세가 성공적이었다고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더글러스 헤이그 총사령관은 다음 목표인 파스샹달Passchendaele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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