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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동부전선

[동부전선: 절대군주제] 불안한 제국

by 롱카이. 2022. 2. 14.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하나로 묶은 절대자

젊은시절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며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는 오스트리아로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후계국으로 인정받아 많은 국가들을 통치하는 제국Imperium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Kaiser로 인정받은 프란츠 1세 사후 프란츠 2세가 제국을 통치했고 1848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3대 카이저로 등극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달마티아의 왕, 갈리치아-로드메리아의 왕, 일리리아의 왕 그리고 제국 도시들의 대공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하는 절대군주로 임명되었습니다. 근면성실한 카이저였던 그는 국정운영을 소홀히 하지않아 유능한 군주로 제국의 신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

그는 수많은 국가들을 통치하며 카리스마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하나로 결집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만든 빈 체제해 대립해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전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로 임명되어 제국의 신민에게 유능한 카이저임을 입증하며 신민들의 존경을 사 제국의 해체를 막았습니다. 허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한 독일 연방은 1848년 독일에서 일어난 3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독일 지역 내에서 국민의회가 등장하며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독일 내 혼란을 빠르게 진압하고 러시아 제국과 연합해 올뮈츠 협약으로 프로이센 왕국이 만든 에어푸르트 연방을 해체하고 다시 독일 연방을 만들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위 성과로 자신의 유능함을 유럽에게 알렸고 1850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절대군주제로 복귀하게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것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것이었으며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곧 오스트리아 제국이었습니다.


  • 제국의 잠재적 해체 위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구상한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허나 그는 유능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새로운 질서인 민족주의의 도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제국의 피지배민족 중 가장 인구가 많던 머저르족은 자신들만의 민족국가 머저로르사그(헝가리) 건설을 원했고 제국 내에서 머저르 민족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머저르 민족주의자의 암살 기도를 당하기도 했고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머저로르사그 독립을 허용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장봉기를 겨우 진압하고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이원군주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진압했습니다. 그 후 그는 민족주의로 제국이 해체될 위험이 아직 남아있는데도 1908년 보스니아를 합병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를 키웠고 언제든지 민족국가로 해체될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이에 그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국의 해체를 막기위해 제국의 여러 민족들의 영역을 제국의 행정구역으로 개편하고 각 민족들에게 동등한 자치권을 주는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구상했습니다. 하지만 카이저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카이저가 사라지는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의 등장을 막기위해 조카를 사라예보로 보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암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카이저 자리를 위협하는 큰 적을 제거했지만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은 더 큰 적을 불렀습니다.


  • 준비되지 않은 차르

러시아 제국 쌍두독수리
러시아 제국의 상징 쌍두독수리

루스 차르국의 새 차르가 된 러시아 표트르 1세는 동유럽의 낙후된 루스 차르국을 근대화하기 위해 직접 서유럽을 탐방하며 근대 문물을 배우고 루스 차르국에 수입해 국가를 개혁했습니다. 그 후 북방전쟁으로 발트해의 맹주 스웨덴 제국을 격퇴하고 발트해의 새로운 맹주로 자리잡으며 스스로 황제에 올라 러시아 제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을 황제 차르가 모든 일을 주도하는 전제군주제로 만들었으며 그의 뜻에 따라 이후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전제군주 통치로 제국을 이끌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국정의 모든 것은 차르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졌고 막중한 역할을 받은 차르는 어린 시절부터 황제 교육을 받으며 제국을 이끌 군주로 성장했습니다.

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2세
황제로 등극한 니콜라이 2세

1868년 로마노프 가문에서 태어난 니콜라이 2세 역시 장차 제국을 이끌 군주로 성장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1894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급사하자 후대 차르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유한 성격을 가졌지만 군주로서는 무능한 인물로 그는 차르로 즉위할 때 스스로 본인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제국을 통치할 절대자가 필요했기에 니콜라이 2세는 제국을 이끄는 군주로 즉위했습니다. 허나 그는 그의 자리에 대해 부담스러워했고 국정운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제국의 마지막 명재상과 암군의 독주

19세기 러시아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진 동유럽의 최강대국이었지만 서유럽의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독일제국과 비교하면 모든 산업이 낙후된 국가였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농노를 해방시키며 농노들이 공장이 있는 도시로 몰려 그 부작용으로 농촌에는 인력이 부족하며 높은 세금으로 농촌 경제가 파산 직전이었으며 도시에는 많은 농노출신들이 모여 인구가 급증해 주거문제가 발생하고 러시아 제국의 낮은 산업으로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상황에 처해젔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농노 해방이라는 개혁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상태였습니다. 이때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재상이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금본위제를 도입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등 국가주도 산업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정책은 대영제국과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여 국방지출을 낭비하는 대신 시베리아 미개척지를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그의 개혁 덕분에 시배리아 횡단열차 연결은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모두 연결하기 전 러일전쟁이 터졌고 그의 개혁으로 농촌경제는 더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비테 백작은 러시아 농촌의 기근을 막아 농민들이 굶주림에서 해방하게 도왔습니다. 세르게이 율리예티 비테 재무장관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측 협상가로 러시아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 러시아 제국의 영웅으로 추양받았습니다. 그는 주변의 신임으로 러시아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지만 차르 니콜라이 2세의 견제로 스스로 총리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제국의 절대자이자 신민들의 아버지인 차르가 신민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러시아 제국의 인민들은 왕정폐지를 외치는 사회주의자들을 주축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국무총리는 차르의 충신으로서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국의 신민들을 버리지 않았고 각종 개혁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는 자영농을 적극 지원하는 농촌개혁으로 자영농을 부농으로 만들어 피폐해진 농촌 경제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농노 해방 이후로도 행해진 농민 탄압정책을 폐지하고 농민에게 적극적인 금융지원을 해 농민들이 더 많은 토지에서 우수한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도왔고 그의 노력 덕분에 러시아 제국은 농업 생산력 최빈국에서 유럽 농업 최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옥토 우크라이나 평원과 중앙아시아 평원을 중심으로 막대한 농작물을 생산했고 이를 수출해 세계 최대 식량수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신민들은 되살아난 농촌과 식량강대국이 된 러시아 제국을 만든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국무총리에 환호했고 차르 니콜라이 2세마저 그를 쉽게 건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911년 9월 18일 그는 공연을 보다 사회주의자의 암살로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제국 최후의 인재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후 그들의 자리를 독선적인 절대자인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장악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개혁은 중단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명운은 쇠해져갔습니다.



  • 제국의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러시아 제국 그리고리 라스푸틴
그리고리 라스푸틴

니콜라이 2세는 오랫동안 차르를 계승할 황태자를 낳지 못하다 1904년 마침내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는 혈우병을 가졌고 잔병치레로 고생하며 유약했습니다. 하지만 영리해 황제와 측근들에게 사랑과 안타까움을 함께 샀습니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의 부모는 귀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지 했고 약물치료가 효과가 없자 종교 치료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때 마침 러시아 시베리아에 있는 고향을 떠나 러시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도승 생활을 하던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현 상트페테르크부르크)에 도착해 알렉세이를 돌보자 그의 병세가 호전되었습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 수도승이 아들의 병세를 호전시킨 것을 목격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 부부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황제 부부의 총애를 받아 러시아 제국의 각종 행사에 참여했고 나중에는 국정에도 간섭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행보가 러시아 제국을 위협에 빠뜨릴 것이라 예상하고 황제 부부에게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멀리할 것을 충고했지만 독선적이었던 황제 부부는 주변 조언을 무시하고 라스푸틴의 행보를 막지 않았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오히려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국정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탐욕스러운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는데는 관심이 없었고 각종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아첨하는 자를 임용하며 러시아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 보스니아가 결정지은 황제들의 운명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보스니아를 합병해 제국의 영역을 넓히며 제국을 강대한 국가로 만들고 위대한 카이저로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세르비아 왕국이 민족국가를 위해 세르비아인들이 사는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왕국의 일부로 편입하고 싶어함을 잘 알았지만 제국의 안녕을 위해 보스니아를 합병했습니다. 이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도발이었고 세르비아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관료들은 부동항으로 진출해 제국의 번영을 누리기 위해 차르에게 세르비아 왕국을 지원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평소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의지했던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전쟁에 참전할 것을 반대했지만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차르로써 제국의 번영을 위해 전쟁 참전을 승인했습니다. 이에 니콜라이 2세보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더 신뢰하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라스푸틴의 말을 믿어야 한다며 남편을 말렸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제국을 위해 전쟁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고 부인과의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하며 그의 말 만을 맹신했고 황후의 비호를 받은 라스푸틴의 폭정이 시작되며 러시아 제국은 내부에서 붕괴 조짐을 보였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제국의 신민들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신민들은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지만 제국의 주인 프란츠 요제프 1세 카이저를 우러러보며 그의 발 아래 모였습니다. 이는 혼란스러운 전쟁 상황에서 제국을 하나로 뭉치게 했지만 그가 부재하면 유일한 결집 수단이 사라져 제국의 해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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