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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시작/주변국의 상황

[주변국의 상황: 이란] 석유와 부패한 카자르 제국

by 롱카이. 2022. 1. 4.

석유와 세계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석유

  • 석유의 등장

석유는 오래 전부터 채굴되었고 사용되어왔습니다. 중세 이슬람 제국들도 석유를 채굴해 불을 붙여 화공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석유는 그 잠재성을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사람의 힘으로 돌리기 힘든 기계를 돌릴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 동력으로 등장한 것이 수증기의 압력을 이용하는 증기기관이었고 물을 끓여 수증기를 내기 위해 석탄이 쓰였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석탄으로 불을 내 수증기를 만들어 기계와 함선을 돌렸습니다. 때문에 석탄은 생산과 군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장했고 전쟁에서 영토를 얻어내며 석탄 광산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석유는 석탄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졌습니다. 에너지 자원으로 사용되던 석탄과 달리 석유는 1850년대부터 불을 밝히는 등유로 사용되었습니다.

램프를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던 석유는 1885년 독일의 공업가 고트리프 다임러가 휘발유로 작동하는 내연기관을 발명하면서 에너지 자원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이로써 석유를 정제해 등유를 뽑아낸 뒤 버려진 휘발유에 대한 수요가 늘었습니다. 이어 루돌프 디젤이 디젤엔진을 개발하고 특허를 내면서 석유는 기계의 동력자원으로 각광받았습니다.

석유는 석탄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더 좋았습니다. 고체인 석탄과 달리 액체인 석유는 저장용량을 적게 차지했고 연소 시 발휘하는 에너지 양도 석탄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점에도 불구하고 석유는 유럽 국가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 점차 증가하는 석유의 수요

석유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석탄을 고집했습니다.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먼저 석유는 석탄에 비해 매장 지역이 한정되어있었습니다. 석유는 러시아 남부, 중동, 멕시코만, 인도네시아에 한정적으로 위치해있어 유럽에서 석유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 지역에서 석유를 실고 와야 했습니다. 때문에 석유 공급에 드는 비용이 높았고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석탄은 유럽에 풍부했습니다.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은 석탄으로 산업과 군사력을 키운 국가였습니다. 이들은 본국에서 채굴 가능하며 광부에게 일자리를 주는 석탄을 버리기를 아까워했습니다. 이들이 석유를 수입하는 순간 석유의 압도적인 효율로 모든 발전기관의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대체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비싼 돈을 들여 석유를 수입하고 석탄 광산의 노동자들을 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때문에 석유 수입은 유럽 국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위험이 컸습니다.

GS 칼덱스 석유와 수송기관
출처: GS 칼덱스 [에너지학 개론] 제1강

https://gscaltexmediahub.com/energy/history-of-oil-2018-06/

 

[에너지학개론] 제1강. 석유의 역사 | GS칼텍스 공식 블로그 : 미디어허브

고대부터 현재까지 석유가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 그 역사를 살펴봅니다.

gscaltexmediahub.com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효율을 내는 석유는 점차 석탄의 자리를 대체해가기 시작했습니다. 1885년 오토바이 연료로 쓰이던 석유는 디젤 엔진으로 기차와 배의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석유를 동력원으로 하는 비행기의 개발과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개발한 양산차 포드 T 모델은 석유를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점차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기계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 대영제국은 점차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석탄을 고집하다가는 석유 도입이 늦어지고 주변국과 경쟁에서 도태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석유로 작동하는 전함의 도입을 주장하던 윈스턴 처칠의 주장에 귀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윈스턴 처칠과 대영제국의 석유 공급처

30대 윈스턴 처칠 대영제국 왕립 해군 해군장관
30대 윈스턴 처칠

육군 기병대 출신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1911년 최초의 해군장관이 되었습니다. 1911년은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이 한창 건함경쟁을 벌이고 있는 때였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이 되자마자 대영제국의 해군력을 독일제국의 해군력을 압도할 방안을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대영제국 주력 전함을 석유 동력 전함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처칠은 대영제국의 전함을 석유 동력 전함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에는 석유가 없었고 미국으로부터 비싼 가격에 석유를 수입해야 했습니다. 반면 웨일즈에는 석탄이 풍부해 많은 영국인들이 외국 석유보다 웨일즈 석탄을 쓰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1908년 이란에 설립된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퍼니(Anglo Persian Oil Company: APOC)를 통해 안정적인 석유 수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1913년 APOC 주식 과반수를 취득해 안정적인 석유 수입원을 확보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이런 노력에 영국 의회는 윈스턴 처칠의 계획에 동의했고 윈스턴 처칠은 석유를 연료로 하는 전함 함대를 구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은 산업과 군사 전부문에 동력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군사 개혁은 훗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그의 성공 이면에는 이란 카자르 제국의 협조가 있었습니다. 카자르 제국은 1901년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가 카자르 제국 전역에 60년간 석유를 채굴 및 정제할 권리를 주었습니다. 윌리엄 녹스 다시는 이 권리를 이용해 이란 전역에서 석유를 찾아다녔고 1908년 석유를 발견하고 APOC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이란 전국토에서 자원을 채굴해가는 동안 카자르 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카자르 제국의 무능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 퇴보한 왕국 카자르 제국

카자르 제국 문장
카자르 제국 문장

 

카자르 제국 전성기 지도
전성기 시절 카자르 제국

1794년 등장한 카자르 제국은 이란을 지배하던 잔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코카서스 일대를 평정해 이란의 새로운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카자르 제국은 전성기 때 아프가니스탄에도 영향을 끼치는 등 강력한 국력을 위시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절대 카자르 제국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1800년대는 유럽 열강들이 중동 전역에 보호국과 식민지를 건설하며 마수를 뻗어가던 시대였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조약서를 들고오며 서명하게 했고 조약 내용에 따라 국가의 자원을 마음껏 수탈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국가들이 유럽 열강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약을 맺어 국익을 침탈당했습니다. 카자르 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자르 제국이 처음 만난 유럽 열강은 러시아 제국이었습니다. 1813년 러시아 제국과 카자르 제국의 전쟁에서 카자르 제국이 패배해 코카서스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빼앗겼습니다. 1828년에 다시 발발한 러시아-카자르 전쟁에서 진 카자르 제국은 아르차흐를 러시아에게 빼앗겼고 러시아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카자르 제국 열강 영토 강탈
열강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카자르 제국


러시아와 전쟁의 패배로 전세계에 무능을 알린 카자르 제국은 1848년부터 서쪽 국경에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시달렸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카자르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야금야금 떼어가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1860년대부터 동쪽의 영국령 인도제국군의 침공으로 동쪽 영토를 빼앗겼으며 러시아 제국도 인도로 진격을 위해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카자르 제국은 사방에서 강대국의 침공에 시달렸는데 제국의 지배층들은 자국의 안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카자르 군주 샤한사는 사치에만 몰두해 있었고 지방관들은 백성을 수탈했습니다. 또 카자르 제국의 지배자들은 뇌물을 받는 대가로 영국인에게 거의 무상으로 항구를 이용할 귄리를 주었습니다. 이에 열강은 점차 카자르 제국의 내륙으로 진출하며 식민지 경제활동을 하며 제국의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습니다.

  • 바비교의 반란과 진압

이스마일파 12이맘파
이스마일파 일종인 12이맘파
사이드 알리 모하마드 바비교의 반란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

기댈 곳이 없던 백성들은 빠른 속도로 바비교에 입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비교는 카자르 제국의 국교였던 싀아파의 십이 이맘파를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십이 이맘파는 874년 순니파의 박해를 피해 숨은 열두 명의 싀아파 이맘들이 바브(문門)과 나이브(대리자)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고 주장하는 종파였습니다. 숨은 열두 명의 싀아파 이맘들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심판의 날에 모습을 들어내 마흐디(구원자 메시아의 이슬람 발음)인 콰임(일어선 자)로서 악마를 물리치고 정의의 치세를 시작한다는 것이 십이 이맘파의 예언이었습니다.

1843년 죽음을 앞둔 사이드 카짐 라쉬티는 싀아파의 분파인 샤이크파의 지도자가 되어 제자들에게 콰임이 곧 도래하니 콰임을 찾으라고 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지도자의 명에 따라 콰임을 찾아다녔습니다. 제자 물라 후세인은 이란을 돌아다니다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를 찾았고 그를 콰임으로 인정했습니다. 24세에 콰임으로 임명받은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열두 이맘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바합(문)으로 불리며 그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스스로를 요한과 싀아파 창시자 후세인 이븐 알리의 환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꾸란을 잇는 경전 파르시 바얀이 자신에게 내려왔으며 최후의 심판이 머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우호적이었던 이슬람 신학자들이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고 왕조는 그를 예의주시하며 박해했습니다.

박해받은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환영하는 이스파한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테헤란으로 붙잡혀 타브리즈로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1848년 샤 모하마드 샤 카자르가 사망하자 이란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카자르 제국군은 우상숭배를 근거로 바비교 교인을 학살했습니다. 1850년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채포되어 샤한사를 사칭하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다.


  • 담배 불매 운동과 입헌혁명

1890년 카자르 제국의 담배 전매권이 영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갔습니다. 카자르 제국에게 담배는 민중들의 고된 삶을 위로하던 중요한 기호품이었습니다. 담배 전매권을 얻은 영국인 사업가는 담배값을 올렸고 이에 민중들은 반발하며 담배 보이콧 운동을 벌였습니다. 담배 불매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은 자말 압딘 알 아프가니였습니다.

자말 압딘 알 아프가니 담배 불매운동
자말 압딘 알 아프가니


자말 압딘 알 아프가니는 이란에서 태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중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벌어진 세포이 항쟁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군의 세포이 항쟁 진압과정을 보며 서구의 위협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구화를 하며 동시에 사치로 부패한 이슬람을 다시 순수한 상태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890년 카자르 왕조의 담배 전매권이 영국인 손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슬람 보수파와 개혁파와 손을 합쳐 1892년 담배 불매 운동을 벌였습니다. 9개월 간 이어진 시위에 카자르 제국의 통치자 샤한샤는 담배 전매권을 다시 회수해왔습니다.

나스르 알딘 샤가 개혁에 반대하던 무슬림 형제단에게 암살당하고 아버지를 이어 재위한 무자파르 알딘 샤는 개혁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가 카자르 제국의 수도 테헤란 은행을 설치하기 위해 이슬람 영묘를 파괴하자 다시 한번 민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입헌혁명이었습니다. 이에 샤한샤는 입헌을 허용했고 1906년 카자르 제국은 입헌 군주제가 되었습니다.


  • 입헌 군주제의 실패와 몰락의 길로 가는 카자르 제국

카자르 제국 모함마드 알리 샤
모함마드 알리 샤

하지만 1907년 새로 등극한 모함마드 알리 샤는 1908년 의사당을 불지르며 입헌 군주제를 취소하고 다시 전제 군주제로 회귀했습니다. 그는 입헌 군주제의 핵심인사들을 대거 해외로 쫒아내고 전제 군주제를 확고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란 전역에서 샤한샤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샤한샤는 러시아 공사로 도망쳤고 러시아 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시위를 무력 진압했습니다. 결국 카자르 제국의 입헌혁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카자르 제국은 1912년 러시아 제국과 대영제국의 영토분할안에 따라 반 식민지가 되었고 대영제국에게 이란 전역의 석유를 무상 제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영제국에게 공급한 석유는 대영제국의 연합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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