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절 전투
1915년 러시아군의 대후퇴를 쫒아 빌뉴스 공세를 펼쳐 쿠를란트를 점령한 독일군은 점령지에 바로 목재로 장벽을 건설해 요새화시켜놓았습니다. 독일군은 리가 주변 늪지대에 나무와 흙으로 강한 방어벽과 요새를 만들어 러시아군의 침공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장벽 후방에 철도를 신설해 신속하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은 철저한 방어 준비로 한동안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러시아 제국의 요충지 중 하나인 리가 근처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독일군의 장벽을 공격해 함락시키려고 했습니다.
1916년 말 새로 협상국이 된 루마니아 왕국이 동맹국에게 수도를 빼앗기며 대패하자 러시아 제국은 리가 방면에 공세를 해 리가를 직접 구하려고 했습니다. 러시아 제12군의 사령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키는 러시아 제12군에게 리가 공세를 명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제12군에 라트비아 여단과 시베리아 사단을 편제해 공세준비를 했습니다. 러시아군의 공격일은 율리우스력으로 1916년 12월 23일, 그레고리력으로 1917년 1월 5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 제국에게는 성탄절이 가까이 온 날이었습니다. 그는 겨울의 강추위로 독일군 요새 앞 늪지대가 단단히 언 것을 확인하고 공세의 성공을 예상했습니다.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키 러시아 제12군 사령관은 옐가바 점령을 목표로 정하고 기습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율리우스력으로 1916년 12월 23일(그레고리력으로 1917년 1월 5일) 러시아 제12군의 라트비아 여단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선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흰색 옷으로 몸을 덮어 위장했습니다. 그 후 몰래 독일군 장벽 앞으로 가 철조망들을 자르고 사전포격없이 독일군 장벽 안으로 기습해 독일군과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성탄절을 기념하고 있을거라 예상해 무방비 상태였고 예고없는 기습에 당황해 후방으로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라트비아 여단은 강추위에 동상에 걸리며 독일군과 전투를 벌여야 했고 이틀간 벌어진 독일 장벽의 전투에서 라트비아 여단은 동상으로 인한 부상과 전투 중 발생한 부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공세로 라트비아 여단은 심각한 병력 손실을 걲었고 후방에
있는 러시아군 시베리아 사단을 동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시베리아 사단은 대규모 폭동과 탈영을 했고 병사들의 불복종에 당황한 러시아 제12군 지휘관들은 공세를 중단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라트비아 여단이 점령한 독일 장벽으로 본대를 보내는 것을 취소해 라트비아 여단은 장벽 안에서 독일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항복했습니다. 독일군은 독일 장벽을 수복한 후 옐가바 방면의 독일 장벽의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이에 러시아 제12군은 성탄절날(율리우스력:12월 25일, 그레고리력: 1월 7일) 티레풀푸스 북부의 모래벽을 공격했습니다. 라트비아 여단과 시베리아 사단은 독일군의 모래벽을 공격했지만 독일군은 모래벽 중앙에 모래언덕을 만들고 기관총을 집중배치해 고지대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했습니다. 독일군의 전략적 방어에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휘관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수많은 병력에 독일군은 기관총 모래언덕을 포기하고 후퇴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리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으로 1917년 1월 23일 독일군은 옐게바 수복을 위해 반격을 가했습니다. 독일군은 티레풀푸스의 러시아군을 포위공격하며 쾌속진격했습니다. 라트비아 여단은 반격을 가했지만 독일군의 기관총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습니다. 독일군은 전속력으로 진격했지만 날씨가 매우 추워져 더이상 진군불가 상태에 빠지자 진격을 중단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세로 상실한 지역의 80%를 되찾았습니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최후
1903년 페트로그라드에 입성해 황태자의 혈우병 증상을 완화시킨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차르 부부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라스푸틴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했으며 신경쇠약이 악화되어 민감해졌습니다. 그녀는 오직 라스푸틴만을 믿었고 주변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태후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 조언했지만 그녀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라스푸틴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그 사실을 잘 알았고 황태후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는 사치로운 생활을 위해 황태후에게 러시아 제국의 세금을 인상할 것을 제안했고 그녀는 다른 대신들의 반발에도 세금을 인상했습니다. 라스푸틴은 황태후의 보호를 믿으며 하루하루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가혹한 세금에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삶이 피폐해졌고 러일전쟁 발발로 국고가 빠르게 소모되자 제국의 신민들은 경제적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신민들은 1905년 1월 9일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의 겨울궁전 앞을 행진했습니다. 이들의 행진은 평화행진으로 제국의 신민들은 절대자이자 아버지인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니콜라이 2세에게 진압을 간청했고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무력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곧 군대는 신민들을 무력진압했고 이에 충격받은 민중들은 총파업, 농촌 봉기, 아나키스트들의 암살과 테러로 1905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혁명은 스톨리핀 재무장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스톨리핀 재무장관은 개혁으로 민중들의 고충을 해결했습니다. 스톨리핀 재무장관은 놀라운 성과를 무기로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시베리아로 유배보낼 것을 요청했고 차르는 라스푸틴을 유배보냈습니다. 하지만 스톨리핀 재무장관이 사회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다시 페트로그라드로 복귀해 국정을 어지렵혔습니다.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은 1915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궁전을 나가 군사령관으로 가면서 알렉산드라 표토로브나 황태후가 국정을 총괄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황태후는 제국을 지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하라는데로만 해 국정을 어지렵혔습니다. 이에 민중들과 제국의 귀족들은 라스푸틴과 황태후를 증오했습니다. 1916년 12월 29일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상황에 러시아 제국 귀족들은 러시아 제국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원흉 라스푸틴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라스푸틴을 파티에 초대한 뒤 음식에 청산가리를 넣어 라스푸틴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라스푸틴이 독살당하기를 원했지만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청산가리가 든 음식을 먹고도 몇시간 멀쩡했고 이에 그들은 라스푸틴을 총으로 쏜 뒤 강철 지팡이로 패서 죽였습니다. 그들은 제국 몰락의 원흉 라스푸틴을 제거했지만 제국의 붕괴를 막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 2월 혁명
1916년 러시아 제국이 야심차게 준비한 동부전선 대공세는 불완전한 승리로 끝났고 무능한 지휘부의 지휘로 수많은 러시아군 병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더불어 동맹군은 효율적인 방어와 공격으로 적은 병력으로 대병력의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선전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대후퇴라는 치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갈수록 러시아군의 낙후된 실상을 노출시켰습니다. 1916년 말이 되면서 병사들은 장교들의 말에 불복했고 집단탈영과 장교 사살 등의 행위를 하며 전쟁의지가 없음을 표출했습니다. 병사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교들을 사살해 평화를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전쟁 중지와 평화를 원한 것은 병사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민중들은 대후퇴 이후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고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가졌습니다. 더욱이 제국의 낙후된 철도 체계로 군 병력 수송에 어려움을 겪어 전투에서 패배하고 식량이 충분함에도 불합리한 철도선 연결로 식량 공급이 계속 연기되어 신민들은 충분한 식량을 배급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1916년부터 후방 식량 공급이 어려워지며 민간인에게 제공되는 식량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1917년 2월 23일(그레고리력: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비보로크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러시아 제국 전국에 파업 시위가 발발했습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페트로그라드로 복귀하는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총파업이 일어났다는 전보를 보냈지만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이를 단순한 소요사태라 보고 무시했습니다. 그 사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졌고 페트로그라드에는 거대한 시위행렬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러시아군 사령부는 무력진압을 명했지만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를 사살하고 시위대에 가담했습니다. 무력행사권을 가진 러시아군도 시위에 참여하자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귀족들은 시위를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시위대에 가로막혀 페트로그라드에 입장하지도 못했습니다. 귀족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해임을 요구했고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3월 2일(그레고리력: 3월 15일) 차르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1917년 3월 12일 타브리다 궁전에서 인민대표들이 모여 소비에트(평의회)를 결성했습니다. 소비에트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구성되었고 다수파였던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부르주아 시대를 거쳐 사회주의 국가 건국을 위해 러시아의 부르주아 시대를 완성하기를 원했습니다. 반면 소수파였던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시대를 건너뛰고 바로 공산주의 국가 건국을 원했습니다.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와의 협력을 적극 반대했지만 멘셰비키는 시대의 수순을 밟기위해 부르주아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편 러시아 부르주아들은 러시아 제국 시절 하원인 두마дума를 역임한 사람들이 많았고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두마дума의 정치활동을 이어 러시아 두마 임시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사회주의를 혐오했지만 민중의 지지도를 얻기 위해 멘셰비키와 협력했습니다. 부르주아의 두마 임시위원회와 사회주의의 소비에트는 서로 권력을 분배해 두마 임시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승인을 받아야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합의했습니다. 이로서 1917년 3월 15일 러시아에는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 이중권력이 지배하는 연립정부가 탄생했습니다.
- 위기의 연립정부
두마위원회는 러시아 임시정부를 건설하고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를 러시아 임시정부의 초대수상으로 추대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허나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자국의 안정을 위해, 협상국으로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맹국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대중들에게 전쟁의 지속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표토로비치 케렌스키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고 사형제를 폐지하며 보통선거를 도입해 러시아 임시정부를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잡게 하려는 노력을 행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는 전제 군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지만 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러시아 임시정부는 암살과 테러 등 과격한 표출을 통제할 수 없었고 사회는 자유로우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더불어 러시아 임시정부는 식량 공급 차질, 장교의 무능과 전쟁의 패배, 낮은 산업기반과 경제파탄, 토지분배 불균형 등 러시아 제국이 만든 실책들을 전혀 해결할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토지 개혁, 산업력 증가 등의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러시아 농민들과 노동자는 개혁의지가 없는 무능한 정권이 전쟁을 지속한다는 것에 반발해 파업과 세금 납부 거부 등을 행했습니다.
반면 소비에트는 전쟁 중단을 원했습니다. 소비에트의 일원이었던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전쟁 중단을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전쟁 유지를 원하던 러시아 임시정부와 충돌했습니다. 허나 러시아 임시정부에 협조적이었던 멘셰비키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주장에 따라 전쟁 유지로 노선을 변경했습니다. 이는 멘셰비키가 러시아의 부르주아 시대를 빨리 완성하고자 한 행위였습니다. 멘셰비키는 러시아 임시정부와 손을 잡아 최후의 전쟁을 주장하며 부르주아 시대의 완성을 도왔고 러시아 임시정부는 민중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은 멘셰비키와 연합해 낮은 임시정부 지지율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둘이 손을 잡은 결과 민중들은 멘셰비키에 실망했고 멘셰비키 지지도는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때문에 러시아 임시정부와 멘셰비키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멘셰비키를 열렬히 지지한 농민과 노동자들은 멘셰비키에 대한 관심을 접고 그들만의 위원회를 자체 운영해 독자 정치활동을 벌였습니다. 반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에게 적대적이었고 전쟁 중단 슬로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볼셰비키는 민중들의 고충을 잘 알았고 민중들에게 빵, 토지, 평화를 약속한다며 선전활동을 하면서 민중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 블라디미르 레닌의 등장
러시아 볼셰비키가 활발한 선전활동을 하며 러시아 인민들의 지지를 받자 독일제국은 전쟁 중단을 외치는 러시아 볼셰비키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독일제국은 끝나지 않는 동부전선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두 전선을 담당했던 독일제국은 어느 한 전선이라도 빨리 붕괴되어 전쟁을 끝낼 것을 원했습니다. 독일제국이 대전쟁 전 빠른 시기 안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서부전선은 참호선의 확장과 동부전선의 예상 외 치열한 전투로 끝나지 않았고 독일제국이 야심차게 준비한 1916년 베르됭Verdun 전투에서 패배하며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동부전선은 러시아 제국이 휘청이다 결국 멸망했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고 독일제국은 러시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동부전선을 종결하고 서부전선에 총력전을 벌일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반해 혁명활동을 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때 정부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 가있는 볼셰비키 대표 블라디미르 레닌을 찾았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제정 러시아 시절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다 정부의 탄압을 받고 서유럽으로 망명하며 외부의 도움 없이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독일제국이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접근해 그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독일제국은 그에게 폭력혁명을 위한 혁명자금과 무기를 지원했고 그에게 러시아로 복귀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이 협상은 비밀 협상이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고민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대전쟁이 터진 이후 독일제국을 맹비난했고 대영제국 등 협상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에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였던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협상국들은 공산주의를 배척하며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협조적이지 않았고 또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귀국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동맹국은 발트해와 흑해를 장악했기 때문에 해로로 귀국하다 동맹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고 육로로도 동맹국이 유럽 중앙을 완전히 점령해 서유럽에서 러시아로 가는 길이 없었습니다. 오직 독일제국과 동맹국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러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동맹국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한때 적이었던 독일제국과 손을 잡았습니다.
허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독일제국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들통나면 러시아에게는 간첩으로 낙인찍히고 대영제국의 공격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제국에게 그의 러시아 복귀를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독일제국은 그를 기차에 실어 몰래 러시아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독일제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귀국하는데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가 탑승하는 열차에 치외법권을 적용해달라는 것으로 다른 승객의 탑승과 여권 검사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제국은 그의 요구를 수용했고 그와 스위스에 거주한 볼셰비키 당원들을 열차에 태운 뒤 자스니츠Sassnitz로 호송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독일제국의 자스니츠Sassnitz에서 내려 페리를 타고 스웨덴 왕국을 거쳐 러시아령 핀란드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Финляндское로 가 1917년 4월 3일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에 도착했습니다.
- 4월 테제
1917년 4월 3일 늦은 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인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러시아군 병사들은 그에게 장갑차를 대령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서 스위스 망명동안 준비한 그의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설로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하고 부르주아 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임시정부 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게는 오직 공산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만이 필요함을 설파하며 제국주의 전쟁인 대전쟁을 중단하고 부르주아에 맞써 싸우는 계급전쟁을 시작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인민들의 박수갈체를 받았고 볼셰비키의 지도자로 등극되었습니다. 전쟁에 지친 러시아 인민들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등장하자 볼셰비키에 희망을 걸었고 볼셰비키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부르주아 타도와 공산주의 혁명을 외치는 볼셰비키를 위험대상으로 바로보고 볼셰비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볼셰비키가 독일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점을 명분삼아 볼셰비키를 탄압했습니다. 러시아 임시정부와 멘셰비키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독일제국의 간첩이라 매도하며 그를 맹비난했지만 그들이 레닌을 압박할 수록 러시아 인민은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 뭉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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