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란드 대공국
18세기 핀란드는 스웨덴 제국의 영토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1809년 러시아 제국과 스웨덴 제국의 전쟁에서 스웨덴 제국이 패배하고 프레드릭스함 조약을 체결해 핀란드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게 할양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핀란드 대공국을 세워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핀란드 대공국의 대공을 겸하는 동군연합으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핀란드 대공국을 입헌군주제로 지정해 러시아 제국과 다른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를 보유할 수 있게 자치권을 보장했습니다. 덕분에 핀란드 대공국은 러시아 제국령이면서 독자 정부를 가진 자치령이었습니다. 때문에 핀란드 대공국에서 수오미Suomi(핀란드인들은 본인을 수오미Suomi 민족으로 부릅니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수오미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 와중 유럽에서 1848년 혁명이 일어났고 수오미 민족도 수오미 민족독립운동을 일으켰지만 러시아 제국은 수오미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습니다. 수오미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제국의 탄압을 피해 스웨덴 왕국으로 대거 망명했고 그곳에서 수오미 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수오미 민족주의자들은 지식인 계급으로 상류층이었던 이들은 북유럽의 질서를 주도하던 스웨덴 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때문에 스웨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수오미 독립운동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 왕국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통일을 주장하며 일으킨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쇠퇴하고 러시아 제국이 관용정책을 펼치자 수오미 독립 여론도 감소했습니다. 그러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핀란드 대공국을 탄압하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해 러시아 제국의 무능을 알리자 수오미 독립운동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 핀란드 적백결렬과 독립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핀란드 대공국은 자체 정부를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봄부터 핀란드 대공국의 농민들은 대파업을 주도했습니다. 핀란드 대공국은 농노제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대지주 휘하의 소작농들이 농사를 짓고 소득의 극미량만 얻는 불합리한 농촌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소작농들은 대지주의 횡포에 반발해 농촌 대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지주들은 자위대를 결성했는데 이들이 핀란드 백위대의 시초였습니다. 핀란드 소작농들이 총파업을 해 식품 품귀현상이 발생하자 도시 노동자들은 이를 부르주아의 횡포로 간주하고 반 부르주아 투쟁,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핀란드 대공국 오스카리 토코이 원로원장은 1917년 7월 권력법Valtalaki을 발의하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발의안을 채택해 수오미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수오미 독립국가를 사회주의국가로 건설하는 것을 희망했으며 이에 여러 부르주아들도 동참했습니다. 이로서 핀란드 사회주의 운동은 확산되었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핀란드 사회주의국가 건국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대지주들과 반사회주의자들은 반발했고 러시아 임시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러시아 임시정부는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킨 후 다시 선거를 해 의회를 재편성했습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높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러시아 임시정부의 개입으로 야당으로 밀려났고 사회민주당은 비폭력 투쟁에 의구심을 표하고 폭력 투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도시의 노동자들도 사회민주당이 야당이 된 것에 분노해 러시아 10월 혁명처럼 총파업을 일으켰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무장 투쟁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폭력 투쟁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핀란드 노동자들과 러시아 볼셰비키는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비난했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여론을 따라 좌파 적위대를 결성했습니다. 그 사이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러시아군 장교로 복무하다 러시아 임시정부의 탄압을 받아 고향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복귀했고 핀란드 우파는 그를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핀란드 우파는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을 중심으로 뭉쳤고 핀란드 우파가 장악한 핀란드 의회에서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원로위원장은 핀란드 독립선언을 추진했고 1917년 12월 6일 의회가 이를 통과했습니다. 핀란드 의회는 핀란드 독립선언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에게 전달했고 독일제국으로부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조인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12월 31일 선언을 승인하면서 핀란드 대공국은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독일제국은 핀란드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압박해 마침내 핀란드 독립을 유도해냈습니다.
- 핀란드 내전
1918년 1월 15일 핀란드 대공국의 페르 에빈드 스빈후브드 원로위원정은 적위대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핀란드 우파의 백위대는 적위대 소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18년 1월 29일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은 핀란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건립된 국가로 핀란드 남부 공장지대와 핀란드 대도시를 차지하고 있었고 핀란드 경제 요충지를 석권했습니다. 더불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Helsinki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대지주의 지지를 받은 핀란드 대공국은 핀란드 북부 농장지대를 차지했고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였습니다. 허나 핀란드 대공국은 유능한 장교들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은 사회민주당 출신이 건국한 국가로 유능한 장교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핀란드 대공국과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의 내전은 시작되었습니다. 핀란드 백위대와 적위대는 각자 분리되어있는 적의 거점을 공격했습니다. 백위대는 적위대가 점령한 오울루Oulu와 바르카우스Varkaus를 공격했고 적위대는 헬싱키Helsinki 근처 백위대의 거점을 공격했습니다.
핀란드 적위대는 철도 교통망을 확보하고 장갑열차를 보유하며 높은 수준의 무장을 갖추었지만 유능한 장교가 부재해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병력이 부족해 소년병들과 여군도 동원해야 했고 핀란드 적위대는 전투 때마다 우왕좌왕했습니다. 이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적위대를 핀란드로 파병해 핀란드 적위대를 돕게 했지만 러시아 적위대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러시아 적위대는 핀란드 적위대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고 핀란드 적위대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전투를 진행했고 1918년 2월 28일 독일제국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공격하면서 러시아 적위대도 핀란드에서 철수했습니다.
한편 스웨덴 왕국은 대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918년 스웨덴 왕국의 엘리트는 연합국으로 가담할지, 동맹국으로 가담할 지 파를 나누어 회의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철광석 수입국인 독일제국이 속한 동맹국으로 참전하려는 여론이 강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중립을 유지했고 동맹국과 연합국의 전쟁에 일절 가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핀란드 내전에는 개입했는데 스웨덴 왕국으로 혁명이 번지는 것을 막기위함이었습니다. 스웨덴 왕국은 스웨덴 의용군을 결성해 핀란드로 파병하며 핀란드 백위대를 지원했습니다.
- 올란드Åland 제도 침공
핀란드 앞바다에 위치한 올란드Åland 제도는 핀란드령으로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 발트 해의 한가운데에 있는 제도입니다. 때문에 스웨덴 왕국이 핀란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올란드Åland 제도를 거점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스웨덴 의용군은 2월 13일 올란드Åland 제도 침공을 결심했습니다. 스웨덴 의용군은 쇄빙선과 연안방어선, 상륙함을 동원해 올란드Åland 제도에 상륙했습니다. 올란드Åland 제도의 핀란드 백위대는 스웨덴 의용군이 백위대를 지원하러 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스웨덴 의용군의 올란드Åland 제도 상륙을 막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핀란드 적위대는 스웨덴 의용군을 위협으로 보고 쇄빙선을 타고 올란드Åland 제도에 상륙했고 러시아 적위대도 가담해 스웨덴 의용군과의 전투를 대비했습니다. 이에 스웨덴 의용군은 거점을 점령했고 적위대가 침공하자 격퇴했습니다. 이후 핀란드 백위대는 올란드Åland 제도에서 철수했고 스웨덴 의용군은 더 많은 함선을 동원해 올란드Åland 제도 전체를 점령했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적위대는 스웨덴 의용군 해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 탐페레Tampere 전투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백위대 총사령관은 백위대의 총공세 작전지로 탐페레Tampere와 비푸리Viipuri 두 곳 중 고민하다 탐페레Tampere를 선택했습니다. 탐페레Tampere는 남북으로 위치한 호수 사이에 길처럼 위치한 도시로 백위대는 탐페레Tampere 좌우를 포위하면 핀란드 적위대를 포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18년 3월 28일 백위대는 적위대를 탐페레Tampere 도시로 몰아넣기 위해 공세를 시작했지만 훈련도가 낮은 백위대는 각개 돌격했고 핀란드 적위대의 방어선에 막혔습니다. 하지만 백위대는 병력을 계속 투입하며 적위대를 도시로 몰아넣었고 적위대를 포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 백위대는 대규모 포격으로 탐페레Tampere 도시를 파괴했고 보병을 투입해 집과 도로를 하나씩 점령하며 진격했습니다. 적위대는 처절하게 저항했고 백위대는 시가전에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에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백위대 총사령관은 비푸리Viipuri 전투를 위해 결성한 예비군을 탐페레Tampere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고 백위대는 막대한 희생 끝에 1918년 4월 6일 탐페레Tampere를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 독일제국의 참전
독일제국은 1918년 2월 28일 러시아에 대공세를 하며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확장해나갔습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은 속절없이 후퇴했고 독일제국은 발트해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독일제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압박해 항복을 받아냈고 레벤스라움Lebensrau을 완성하기 위해 핀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은 핀란드 적위대와 싸우는 핀란드 백위대에게 지원을 제안했습니다. 핀란드 백위대는 독일제국의 지원을 거부했지만 거듭되는 전투로 백위대 병력을 상실해갔고 병력이 부족해지자 독일제국의 참전을 승인했습니다. 독일제국은 1918년 2월 28일 독일군 병력을 파병했고 1918년 3월 5일 독일군은 올란드Åland 제도에 상륙했습니다. 제도를 점령한 스웨덴 의용군은 독일군의 상륙을 도왔고 독일군은 올란드Åland 제도 근처 러시아 적위대를 체포했습니다. 이후 독일군은 올란드Åland 제도를 거점으로 삼아 헬싱키Helsinki 전투에 가담했습니다.
- 헬싱키Helsinki 전투
독일군이 백위대에 가담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들은 핀란드 적위대는 1918년 4월 8일 수도를 헬싱키Helsinki에서 비푸리Viipuri로 이전했습니다. 그리고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과 독일제국은 4월 11일 협상을 했으나 결렬되었고 독일군은 4월 12일 헬싱키Helsinki 항구를 봉쇄하고 도시 북서쪽에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핀란드 적위대는 결사항전했으나 수준 높은 훈련을 받지 못한 적위대는 전투 경험이 충분한 독일군을 상대할 수 없었고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돌격했습니다. 더불어 헬싱키Helsinki에 잠입한 핀란드 백위대도 활동을 시작하며 적위대의 후방을 교란했습니다. 핀란드 적위대는 4월 13일 항복했고 독일군은 헬싱키Helsinki에서 열병식을 올리며 독일제국의 위엄을 알렸습니다.
- 핀란드 내전의 종식
헬싱키Helsinki 전투에서 패배한 적위대는 패전을 실감했고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 당원들과 적위대는 핀란드를 떠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잔존 적위대도 5월 5일 항복하면서 핀란드에서 적위대는 소탕되었습니다. 핀란드 내전 동안 백위대와 적위대는 소년병과 여군을 동원하며 전투를 치뤘고 우수한 병기를 지원받았지만 미흡한 훈련과 전술로 전투를 치룰 때마다 수많은 희생을 치뤘습니다. 더불어 백위대와 적위대는 서로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를 일으키며 병사와 민간인을 사살했고 복수극을 행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테러에 희생되었습니다. 더불어 핀란드 남부 공업지대가 전투로 파괴되어 핀란드 경제는 파탄나고 핀란드 북부 농장지대의 사람들도 징집되어 농업 생산력이 급감해 많은 이들이 기아로 고통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핀란드 내전은 수오미 독립국가 건국 후 수오미 민족끼리 벌어진 동족상잔으로 수오미 민족이 이념에 따라 분열되고 민족이 해체되며 많은 사람들이 해외 난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핀란드 대공국은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독일제국의 지배 하에 놓일 위험에 시달렸습니다. 핀란드 내전 종식에 큰 기여를 한 독일제국은 핀란드 국정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독일제국이 구상한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따라 핀란드를 독일제국령으로 합병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제국은 대전쟁을 끝내기 위해 끝까지 남은 서부전선에 루덴도르프 공세를 펼쳐 서부전선에서도 승리를 이끌어내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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