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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시작/주변국의 상황

[주변국의 상황: 중국] 몰락한 황제국과 비참한 미래

by 롱카이. 2022. 1. 11.

근대 자금성 흑백 사진
자금성

  • 전세계의 돈을 빨아들인 청나라

청나라 도자기
청나라 명품상품 도자기

청나라는 일부 항구를 개항하며 전세계 국가들과 무역을 했습니다. 청나라는 무역으로 여러 상품을 수출했는데 그 중 특히 비단과 차, 도자기가 인기가 많은 상품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비단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질을 자랑했고 도자기는 일본이라는 경쟁자가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이 청나라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청나라 비단과 차, 도자기에 매료된 전세계 국가들은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비단과 차, 도자기를 수입했습니다.

18세기 은의 흐름
18세기 은의 흐름

18세기는 은이 세계 화폐로 쓰이던 시대였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은을 대량채굴해 은화를 발행한 이후로 유럽 국가들은 은을 화폐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도 이에 호응해 은을 채굴하고 화폐로 사용했습니다. 대항해시대로 세계를 누비는 유럽 국가들과 동남아시아와 무역거래를 한 일본 덕에 전세계 많은 국가들이 은을 공용화폐로 사용했습니다.

청나라 광저우 항구
청나라 항구 광저우. 전세계 은화가 광저우에 갇혔다.


이는 청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청나라 마카오 항구에 도착한 수많은 외국상인들이 비단과 도자기를 은으로 구매했습니다. 청나라는 고액의 은화을 받고 상품을 팔았습니다. 때문에 전세계 화폐의 흐름은 기이하게 흘러갔습니다.

정상적인 화폐의 흐름은 전세계를 돌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럽&중동 전역과 아메리카,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은 화폐가 순환했습니다. 은 화폐를 세금으로 충당하고 무역을 통해 물품을 거래하며 은 화폐는 여러 곳을 끝없이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순환하던 모든 은 화폐는 청나라에 막대한 양이 들어갔고 청나라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 경제흐름에 막대한 은화를 사용했고 무엇보다 청나라는 수출상품은 많아도 수입상품이 없었습니다. 청나라 도자기는 이미 세계 일류이고 비단을 대체할 제품이 없었씁니다. 영국령 인도제국에 풍부한 목화로 만든 면화도 청나라 비단에 비하면 저질의 상품이었습니다. 때문에 청나라는 수출상품을 팔며 은화를 얻지만 수입을 하기 위해 은화를 쓸 일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전세계의 은화가 모조리 청나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청나라에 들어간 은화가 나가지를 않자 전세계는 은화가 부족해지는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화를 더 채굴하고 일본의 도움도 받았지만 은화는 한정적이었고 은화를 화폐로 사용하던 국가들은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해졌습니다. 은화로 세금을 받던 국가들은 은화가 동나면서 세금이 줄었고 평민들은 세금으로 은화를 다 뺏긴 채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지배층은 막대한 은화를 지출하며 도자기를 샀지만 시간이 갈수록 은화 재산이 줄어들었습니다.

때문에 전세계 국가들은 청나라에 들어간 은화를 빼낼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다 대영제국 눈에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생산되던 아편이 눈에 띄였습니다.

청나라 시절 전세계 GDP 순위
18세기 말 청나라는 전세계 은화의 절반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 청나라에 갇힌 은화를 빼내라

청나라 민중 아편 중독
아편에 중독된 청나라 민중

청나라는 마땅한 수입상품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수출상품으로 벌어들인 은화를 국내에서 유통하며 해외로 유출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대영제국이 청나라에 새로운 상품을 공개했습니다. 바로 아편이었습니다. 마약이었던 아편은 곧 청나라 내에서 수요가 폭증했고 수많은 민중들이 아편을 구매했습니다. 청나라가 아편 구매를 위해 영국령 인도제국에 은화를 주고 아편을 사기 시작하자 막대한 양의 은화가 영국령 인도제국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청나라 입장에서 경제위기였습니다. 수많은 민중들이 아편에 빠져 생업을 중단하고 청나라의 은화가 빠른속도로 해외로 유출되어 청나라는 시간이 갈수록 재정난에 시달렸습니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임칙서를 파견해 문제해결을 촉구했습니다.


  • 청나라의 몰락을 알린 신호탄: 아편전쟁

청나라 임칙서 아편전쟁
임칙서

광저우로 파견된 임칙서는 바로 문제 해결에 나섰습니다. 임칙서는 광저우 항구에 있는 수많은 아편을 폐기하며 아편단속에 나섰습니다. 임칙서가 파견되기 전에도 수차례의 아편단속으로 아편의 양이 많이 줄었지만 임칙서는 아편 수입을 완전히 단절하려고 했습니다.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한 영국령 동인도회사(영국령 인도제국)은 영국 본토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본토는 도움을 묵살했습니다.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어떻게든 망해가는 사업을 살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839년 영국인이 중국인을 피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피해자의 유가족에게 배상하고 치외법권을 이용해 가해자 영국인을 무죄판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가해자를 청나라로 인도하기를 요구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영국 법령을 들먹이며 거부했지만 임칙서가 영국 법령을 가져와 반박하자 동인도회사는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임칙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령 동인도회사 사람들을 모두 국외추방했습니다. 또 영국과 청나라의 국교단절을 선포했습니다. 영국령 동인도회산느 정말 사업이 망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영국 의회에 로비를 하며 전쟁을 요구했습니다.

영국 의회도 전쟁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명백히 영국측이 잘못한 상황으로 전쟁 명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동인도회사의 끝없는 로비 끝에 전쟁을 승인했고 184년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이끌고 바로 청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청나라 아편전쟁
아편전쟁

전쟁이 시작되자 동인도회사 군대는 청나라 항구를 점령해가며 빠르게 난징(南京)으로 진격했습니다. 결국 영국의 압도적인 화력에 굴복한 청나라는 난징조약을 맺고 항구를 개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아편전쟁으로 청나라의 아편단속을 취소시키고 항구를 열어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영국의 경제침탈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 전성기 영토
전성기 시절 청나라. 엄청난 영토를 보유해 다른 국가들은 청나라를 강대국이라 생각했다.

아편전쟁은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전쟁 전 전세계는 청나라를 신비롭고 힘을 숨긴 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편전쟁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한 청나라는 퇴보한 국가임을 전세계에 알린 꼴이었습니다. 이에 전세계 국가들은 슬슬 청나라에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2차 아편전쟁과 청나라의 분할

제2차 아편전쟁 그림
제2차 아편전쟁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청나라의 은화를 가져가려고 한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청나라 문호를 열어서 사업을 벌였지만 문호가 열리면서 오히려 청나라 내부에 존재하던 막대한 물량의 비단, 차, 도자기가 쏟아져나왔습니다.

본래 청나라는 광저우 항구만 열고 수출 상품 수를 조절해가며 무역을 했습니다. 광활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로 무장한 청나라는 막대한 양의 비단, 차, 도자기를 생산했고 그 중 일부만이 해외로 수출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이 사실을 몰랐고 문호를 개방하고 자유무역을 허용해버리자 청나라 본토에 있던 엄창난 물량의 상품들이 쏟아져나온 것이었습니다.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전과 비교되지 않는 막대한 수입상품에 깔렸습니다.

회사는 수입상품을 수입할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은화를 청나라에 지출해야했습니다. 무역 흑자를 보려고 자유무역을 하니 오히려 적자가 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심각한 적자로요. 더군더나 청나라 내부에서 아편을 생산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회사는 작전을 변경해 청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려고 했습니다.

회사는 이번에도 황당한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청나라 수군이 영국 선박 애로호를 단속하던 중 영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영국 의회도 황당한 이유에 기가 차서 전쟁 안건을 부결하려 했지만 영국 총리가 강제로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프랑스도 선교사 박해를 명분으로 청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청나라 항구를 점령했고 수도 베이징(北京) 바로 앞 항구 톈진(天津)을 점령했습니다. 이어 베이징으로 진격한 영프 연합군은 베이징을 약탈하며 도망간 황제에게 무력시위를 벌였고 결국 청나라 황제 함풍제는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 청나라는 톈진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은화를 납부해야 했고 11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내륙으로 외국인과 군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허용해야 했습니다. 이어 전쟁을 중지한 러시아 제국에게 연해주를 주며 청나라는 점차 유럽 열강의 침입을 실감했습니다.


  • 중화질서의 붕괴

청나라는 황제국을 천명하며 주변 제후국에게서 조공을 받고 제후국에게 조공품보다 더 많은 답례품을 하사하며 중화질서를 지켰습니다. 청나라는 서쪽의 카자르 칸국(현 카자흐스탄), 남쪽의 버마, 시암(태국), 란쌍(라오스), 대월(베트남), 술루(필리핀), 인도네시아, 동쪽의 류큐, 일본, 조선을 제후국으로 책봉하고 조공무역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천자국으로서 제후국의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아편전쟁 이후 제후국에 위협이 가해졌습니다.

베트남 청프전쟁
대월(베트남)을 두고 일어난 청프전쟁

첫번째 위협은 프랑스의 대월 침공이었습니다. 대월 응우옌 왕조 건립에 도움을 준 것을 빌미로 프랑스는 대월 정치에 개입했습니다. 이에 대월 조정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며 프랑스에 저항의지를 보였습니다. 1858년 프랑스는 선교사 처형을 명분으로 대월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이에 대월은 당시 청나라에 일어났던 태평천국운동을 주도하던 세력 중 하나인 흑기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대월의 수도 하노이에서 프랑스와 흑기군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전투는 흑기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패배한 프랑스는 더 많은 군사를 이끌고 하노이를 침공했습니다. 그러자 대월 조정은 천자국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청나라는 이에 응해 제후국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대월에서 만난 양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자는 조약을 맺었고 프랑스는 조약 채결 바로 직후에 청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했고 청나라가 승기를 잡자 둘은 다시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조약 내용을 교묘하게 변조해서 청나라를 속였고 조약 내용에 따라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했습니다. 청나라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당해 진 상황이었습니다.

이어 1894년 일본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청과 일본은 타이완 섬과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청일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했습니다. 이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중화 천자국에서 일본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는 청나라의 수치였고 더이상 중국이 동아시아의 질서를 수호하는 국가가 아님을 전세계에 알린 것이었습니다.


  • 열강의 침탈과 어두운 미래

청나라의 반식민지화
청나라의 반식민지화

유럽 열강들은 청나라를 식민지화하려고 했습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험이 없는 국가가 청나라였고 청나라의 압도적인 인구와 자원은 열강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너무나도 광대한 영토는 열강들이 쉽사리 식민지화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열강들은 각자 조약을 맺어 조차지를 만들고 청나라를 반식민지화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청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열강들의 노골적인 침탈에도 청나라 황제는 무력했습니다. 황제는 자국이 국권을 잃고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눈앞에서 봐야만 했습니다. 더이상 희망은 없었습니다. 황제는 실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파악한 황제의 신하들이 각자 독립했습니다.


  • 황제국의 멸망

위안스카이 컬러사진
중국의 실권자 위안스카이

1911년 열강의 침입이 눈에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황제에 반발해 군대가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지식인들도 동참해 봉기에 참여했고 혁명군은 우창에서 중화민국을 선포했습니다. 이 사건을 신해혁명이라 합니다. 청나라 정부는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하던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에 혁명 진압을 명하지만 북양군벌은 자금성을 점령해 청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 2천년을 유지해오던 천자국이 멸망하고 위안스카이의 독재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리고 망조가 든 청나라는 망했지만 사정은 더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스스로 변화도 해봤지만 망해가는 기류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망할 운명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기 전에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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