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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발칸전선

[발칸전선: 국론분열] 두 세력으로 쪼개진 그리스 왕국

by 롱카이. 2022. 3. 3.
  •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

메갈리 이데아 범위
파란색-1887년 영토 / 노란색-메갈리 이데아 영토

1821년 헬라스인(그리스인)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헬라스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민족주의를 지원하던 프랑스 제3공화국과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의 지원을 받아 1822년 독립했습니다. 이후 공화정으로 국가를 운용하다 1833년 왕정이 들어서 그리스 왕국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리스 왕국은 독립 직후부터 같은 영토를 유지했는데 그리스 왕국의 영토는 펠로폰네스Πελοπόννησος 반도에 한정되었습니다. 허나 그리스 왕국은 좁은 영토에 만족할 수 없었고 영토를 확장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왕국은 영토 확장 명분을 위해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주창했습니다. 그리스 왕국은 그리스 왕국이 동방 정교회의 수호국인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비잔티움 제국의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왕국은 콘스탄티누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와 크레타Κρήτη 섬을 회복해 에게Αιγαίο 해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헬라스 민족주의자들은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주장하며 동방 확장을 추구했고 그리스 왕국은 제1차 발칸전쟁과 제2차 발칸전쟁 때 승전해 마케도니아Μακεδονία 남부를 수복했습니다.


  • 한 나라 두 정부

그리스 국론분열 그리스 왕국 마케도니아 총독부
진한 파량: 구 그리스 왕국 영토 / 하늘색: 새로 얻은 그리스 왕국 영토

그리스 왕국은 제2차 발칸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확장하며 그리스 독립 이후의 영토의 2배에 달하는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덕분에 그리스 왕국은 좁은 펠로폰네스Πελοπόννησος 반도의 많은 인구들을 새 지역으로 이주해 살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왕국은 제2차 발칸전쟁으로 얻은 새 영토인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를 지배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총독부를 설치해 지방 정부를 운영했습니다. 허나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는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펠로폰네스Πελοπόννησος 반도에 그리스 왕국이 들어선 이후로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오래 전 독립한 그리스 왕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총독부는 펠로폰네스Πελοπόννησος 반도의 정부와는 다른 통치를 하며 반독립적인 정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 왕국의 중앙 정부 역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고 마케도니아 총독부의 자율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왕국에는 남부의 왕궁과 북부의 총독부라는 두 정부가 존재했습니다.


  •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
콘스탄티노스 1세

콘스탄티노스는 1868년 아테네Αθήνα에서 요르요스 1세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82년 그리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그리스 왕국의 장교로 복무하다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Berlin으로 유학을 가 군사교육을 받고 프로이센 왕실 근위대 장교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조피 소피아 공주와 결혼을 결정하고 1889년 그리스 왕국으로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는 1897년 그리스-튀르크 전쟁을 지휘했지만 그리스군이 오스만군에게 대패하자 그리스 왕국 백성은 왕실을 불신했고 그는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그는 한동안 그리스 국민들의 해임 요구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발칸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그리스 왕정의 권위를 높였고 그리스 왕국의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제2차 발칸전쟁 그리스군 콘스탄티노스 1세
왕자 시절 그리스군을 지휘한 콘스탄티노스 1세

콘스탄티노스 1세는 제2차 발칸전쟁 동안 부왕 요르요스 1세가 살해되자 그리스 왕국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제2차 발칸전쟁을 승리로 끝낸 그는 오랜 시간 프로이센 왕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적으로 독일제국과 가까웠습니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사적으로 빌헬름 2세와도 만남을 가졌고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 독일제국의 편에 서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비밀동맹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로 서로 배신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허나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왕국에게 숙적이었기에 그리스 왕국의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국민 여론을 생각해 동맹국에 가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전쟁이 터지자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독일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중립국을 선포했습니다.


  •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

그리스 엘리프테르오스 베니젤로스 총리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왕국이 독립한 후 아직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인 크레타 섬에서 발발한 독립운동을 목격하며 성장했고 그리스 왕국의 아테네Αθήνα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크레타 자치국의 사법부 장관으로 활동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1908년 독단적으로 크레타 자치국과 그리스 왕국의 합병을 승인했지만 강대국들과 그리스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을 두려워해 그의 승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크레타 자치국의 정계에서 쫒겨나 그리스 왕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는 그리스 왕국에서 국왕 요르요스 1세 아래 그리스 왕국을 개혁하고 총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왕국을 개혁하고 두 차례의 발칸전쟁에서 유리한 협상을 성공시켜 영토를 확장해 그리스 왕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승리해 그리스 왕국의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또다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914년 대전쟁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에 가입하자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그리스 왕국 총리는 그리스 왕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국론분열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

그리스 왕국 국론분열
총리와 국왕

그리스 왕국의 두 영웅인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대전쟁이 터지자 그리스 왕국을 중립국으로 선포했고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연합국으로 참전할 것을 제안했지만 총리도 중립국 유지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15년 2월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갈리폴리 전쟁이 시작되자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연합국에 가담해 갈리폴리 전쟁에 참가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그리스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실현시키기 위해 연합국에 참여해야 한다고 국왕을 끊임없이 설득했고 독일제국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이에 난처해했습니다. 국왕은 연합국 가담을 최대한 보류했고 국왕과 총리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습니다.

그리스 왕국 국가 방위 운동
국가 방위 운동

1915년 대후퇴하는 세르비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연합군이 동부군을 결성해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에 상륙하려고 하자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국임을 강조하며 동부군의 상륙을 막으려고 했지만 동부군은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에 상륙했고 많은 그리스 북부인들이 동부군을 환영했습니다. 그리스 북부인들은 불가리아 차르국의 침공에 긴장하고 있었고 때문에 동부군을 불가리아군의 침공을 막을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그리스 북부인의 여론에 동부군의 상륙을 방임했습니다. 1916년 마침내 불가리아 차르국이 그리스 왕국을 침공하자 그리스 왕국의 여론은 술렁였습니다. 동맹국인 불가리아 차르국이 마케도니아 탈환을 목표로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를 침공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연합국에 가담하자는 여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그럼에도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국을 유지했고 항의하는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를 강제로 해임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베니젤로스 파 그리스군 장교들은 1916년 9월 15일 국가 방위 운동을 펼쳐 그리스 왕당파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엘리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그리스 북부에 국가 방위 과도 정부를 건립했습니다. 국가 방위 과도 정부는 국가 방위군을 결성하고 1916년 11월 26일 동맹국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연합국은 1916년 12월 1일 그리스 국가 방위 과도 정부를 연합국으로 인정했고 국가 방위군은 불가리아군에 대항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국가 방위 과도 정부는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 크레타Κρήτη 섬, 에게Αιγαίο 해 제도들을 실질통치했고 그리스 국왕파와 대립했습니다.

그리스 국론분열 내전
국론분열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이에 분노했고 그리스 왕국의 중립국 지위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국왕에 충성하는 왕당파도 중립국을 고수하며 국가 방위 과도 정부를 비난했습니다. 그리스 왕국과 국가 방위 과도 정부는 서로를 비난했고 반대파를 가혹하게 숙청했습니다. 그리스 왕국과 국가 방위 과도 정부는 연합국 가담을 두고 논쟁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군주정와 공화정, 자영농과 자본주의 등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등으로 성장했습니다. 결국 그리스는 두 개의 정부가 서로 대립했습니다.

그리스 국론분열 프랑스군의 아테네 포격
아테네를 점령한 프랑스동부군

연합국은 그리스 왕국이 끝까지 중립을 유지하자 1916년 12월 1일 대영제국 왕립 해군과 프랑스 해군으로 구성된 연합국 해군을 파병해 아테네Αθήνα 인근 항구를 봉쇄하면서 그리스 왕국을 협박했고 국가 방위 과도 정부를 연합국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Αθήνα를 함포 포격하고 일부 프랑스 동부군을 상륙시켜 아테네Αθήνα 일부 지역을 무력 점령해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를 협박했습니다. 그 사이 자체 무장한 국가 방위군은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를 페위시키러 남진했고 1917년 1월에 테살리Θεσσαλία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방위군은 연합군과 함께 그리스 서부와 남부로 진격했고 알바니아 서부 일부와 그리스 왕국 북서부를 점령했습니다.

아테네를 포격하는 프랑스 해군 전함
아테네를 포격하는 프랑스 해군 전함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는 친척관계였던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의존하며 겨우 연명했지만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자 마지막 지지자를 잃었습니다. 그 사이 연합국은 그리스 왕국을 더 압박했고 1917년 6월 11일 프랑스 동부군은 그리스 왕국군이 잔존한 테살리Θεσσαλία를 점령하고 전함을 이끌고 아테네Αθήνα 앞바다에 나타나 아테네Αθήνα를 포격했습니다. 연합군의 압박에 1917년 6월 11일 스스로 퇴위하고 스위스로 망명했습니다. 그의 첫째 아들은 연합국의 강요에 그와 함께 망명했고 그의 둘째 아들이 그리스 왕국의 국왕 요르요스 2세로 임명되었습니다. 친독파였던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요르요스 2세는 연합국에 가담하고 싶어했고 그리스 왕국은 1917년 6월 27일 동맹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연합국에 가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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