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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 제1~4차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군의 부진

by 롱카이. 2022. 3. 7.
  • 이탈리아 왕국의 목표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왕국 루이지 카도르나 참모총장
루이지 카도르나

연합국의 승전에 큰 공헌을 하고 싶었던 이탈리아 왕국은 1914년 러시아 제국이 실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 침공 작전을 성공해 빈Wien을 함락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멸망시킨 뒤 러시아 제국과 함께 독일제국을 압박한다는 원대한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국경지대의 알프스Alpi 산맥을 제외하고는 평야 지대였고 평야는 공세에 최적화된 장소였습니다. 허나 평원 앞에 놓인 알프스Alpi 산맥은 험준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자연 방패물이 되었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군은 헝가리 대평원Alföld으로 진격하기 위해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군사거점인 트리에스테Trieste 항구를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참모총장은 이탈리아 전선의 총지휘권을 행사했고 그의 지휘 하에 이탈리아군은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 열약한 이탈리아군 사정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이탈리아군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이탈리아 왕국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침공은 이탈리아 민족 숙원 전쟁으로 이탈리아 왕국은 이 전쟁을 그 어떤 전쟁보다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하기 전 철저한 대비를 했습니다. 허나 1911년부터 1912년까지 발발한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 물자를 대부분 소모했고 충분한 양의 전쟁 물자를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군의 병기는 구세대의 병기를 유지했고 포탄과 기관총의 물량이 부족했습니다. 더불어 1915년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 안코나Ancona를 기습 공격해 이탈리아 반도 동부 철도선을 파괴해 이탈리아 남부의 병력과 물자의 보급은 늦어졌고 이탈리아 북부의 병력과 전쟁물자로 전쟁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보급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보급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동부전선과 발칸전선 양면 전선으로 국력을 빠르게 소모해갔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특히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막대한 물량 공세를 막아야 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 밖에 없었고 이탈리아 전선에는 소규모의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탈리아군에 비해 항상 열세였고 험준한 산맥은 그들을 지켜주는 자연 방어막이기도 했지만 보급을 어렵게 하는 방해물이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으로 두 배 이상의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대항해야 했고 이는 매우 열약한 환경이었음을 보여줍니다.

 

 

 

  • 제1차 이손초 전투

제1차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군 선전 포스터

이탈리아군을 지휘한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단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로 침공할 공세를 구상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장인 헝가리 대평원Alföld으로 진격하기 위해 헝가리 대평원Alföld의 입구인 트리에스테Trieste를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총참모장은 세부 공세를 계획했는데 주 공세는 베네치아 줄리아Venezia Guia를 점령하는 것이며 2차 공세는 도비아코Dobiaco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주 공세를 시작하기 전 5월 24일 카포레토Caporetto를 점령하고 6월 16일 네로Nero 산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공격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그는 계획에 따라 1915년 6월 23일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3개 병력으로 나뉘어 이탈리아 제2군은 톨민Tolmin과 고리치아Gorizia를 공격하고 이탈리아 제3군은 크라스Carso를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제1차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군의 진격
제1차 이손초 전투

6월 23일 고르치아Gorizia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한 이탈리아 제2군은 플라바Plava를 공격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 위를 건너야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다리를 집중 포격하면서 이탈리아군의 진군을 방해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다리 건너 강한 방어진을 형성했고 이탈리아군의 도강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군의 진격은 막혔습니다. 이 전황은 고리치아Gorizia 인근 이손초Isonzo 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고 이탈리아군은 이손초Isonzo 강에 부교를 놓아 강을 도하하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집중 포격에 강을 도하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고리치아Gorizia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탈리아군은 시가전에서 패해 고리치아Gorizia에서 후퇴했습니다. 크라스Carso 평원을 점령하기 위해 출동한 이탈리아 제3군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강력한 참호선에 막혀 진군에 실패했습니다. 한편 주 공세인 톨민Tolmin 공세는 7월 3일 매우 늦게 행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남부 보급선에 문제가 생겨 충분한 양의 보급을 받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톨민Tolmin 공세를 하는 이탈리아 제2군은 네로Nero 산을 우회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방어진을 돌파하고 진격해야 했고 이탈리아 제2군은 정면돌파를 시도했습니다. 이들의 돌격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발각되어 야포 집중 사격을 받고 잠시 취소되었습니다. 이탈리아군보다 병력이 열세인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탈리아군이 주춤한 사이 병력을 후퇴시켰고 다리를 폭파해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방해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전진했지만 병력 손실로 7월 7일 공세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총참모장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비록 후퇴했지만 병력 손실은 미미했고 이탈리아군은 반대로 큰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총참모장은 어떤 전술 없이 돌격명령을 고집했고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홀몸으로 참호와 바위 등의 엄폐물로 몸을 가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진지로 돌격해야 해 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더불어 남부의 보급 지원이 지연되자 이탈리아군의 병기가 부족해져 마땅한 공격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도 처해졌습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총참모장이 지휘했고 동부전선에서 실전경험을 가진 그는 전략적으로 후퇴하며 이탈리아군의 손실 최대화를 유도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적은 병력 손실로 이탈리아군 병력 상실을 최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 제2차 이손초 전투

제2차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숲을 점령한 이탈리아군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제1차 이손초 전투의 실패를 복기하며 부족한 포병 화력을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포탄을 준비했고 크라스Carso 평원을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허나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포병 전력만 늘렸을 뿐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호를 절단할 절단기 등의 공구를 보급하지 않았고 이탈리아군은 철조망을 제거할 도구 없이 철조망으로 돌격해야 했습니다. 1915년 7월 18일 이탈리아군은 두번째 공세를 시작했고 이탈리아군은 7월 25일 카푸치오Capuccio 숲과 카포레토Caporetto의 코바리드Kobarid를 점령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산 미켈레San Michele 산도 점령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으로 산에서 후퇴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제2차 이손초 전투로 제1차 이손초 전투보다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했지만 무식하게 병력을 투입해 얻은 결과로 8월 3일 전투가 끝난 후 이탈리아군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 제3차 이손초 전투

제3차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군
제3차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군은 2달의 휴식으로 병력을 회복했고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포병의 전략적 운용이 중요함을 실감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세번째 공세 때 플레초Plezzo, 톨민Tolmin을 점령하고 가능하다면 요새도시인 고리치아Gorizia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915년 10월 18일 이탈리아군은 공세를 시작했고 이탈리아군은 플라바Plava와 크라스Carso 평원, 산 미켈레San Michele 산을 점령했습니다. 허나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전 방위에서 포격을 고집했고 모든 방위에 가해진 포격 공격은 산개되어 약했습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적재적소에 지원 포격을 할 수 있었고 후방 병력을 축차 투입해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모두 격퇴했습니다.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별 소득을 보지 못하고 11월 4일 공세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 제4차 이손초 전투

제4차 이손초 전투세이 부시 산 전투
제4차 이손초 전투

3번의 실패에도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총참모장은 크라스Carso 평원과 고리치아Gorizia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제2군과 제3군을 투입해 이손초Isonzo 강을 건너 고리치아Gorizia를 포위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제2군은 고리치아Gorizia 북부 산악지대를 통과해 북부로 진격하라고 명했고 제3군을 해안가를 따라 남부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4번째 공세는 11월 10일 시작되었고 이탈리아 제2군은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중 세이 부시Sei Busi 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혈전을 벌였고 이탈리아 제3군은 해안지대를 따라 이동하는 도중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조우해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선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병력들을 대규모로 투입했고 양측은 근거리에서 접전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뤘습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모두 심각한 손실을 입어 서로 공격을 못하게 되면서 12월 2일 종결되었습니다. 양측은 심각한 병력 피해를 보았고 이탈리아군은 예비군을 현역군으로 변경해 전장에 투입해야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독일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 콜레라의 창궐

콜레라균 이손초 전투
콜레라 균

네 번째의 공세는 겨울이 다가오자 중단되었습니다. 1915년과 1916년 사이의 겨울 동안 병사들은 더 이상 전투를 치루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허나 병사들은 겨울동안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 적은 콜레라 균으로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사들은 열약한 전쟁터 환경과 좋지 않은 식량 보급으로 항상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영양 섭취를 충분히 하지 못해 질병에 취약했습니다. 병사들은 1915년 겨울이 오기 전 콜레라 균에 감염되었고 설사와 전쟁터의 물을 통해 콜레라균이 전파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 전체가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고생했습니다. 전쟁터의 야전 병원은 항상 의료 장비 부족에 시달렸고 병사들은 콜레라 균의 감염으로 죽어갔습니다. 양측 부대 소속 간호사들은 감염병에 고통받는 장병들을 치료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러는 사이 참혹했던 대전쟁 첫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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