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됭Verdun 전투
1916년 2월 독일제국은 서부전선의 베르됭Verdun 요새 지대로 대규모 공세를 가하면서 대전쟁 동안 벌어진 전투 중 최대 전투인 베르됭Verdun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급작스러운 대공세를 맞이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고 조제프 조프르 프랑스군 총참모장은 연합국에게 동맹국에 대한 공세를 촉구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은 조제프 조프로 프랑스군 총참모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섯번 째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허나 이탈리아군은 갑자기 공세를 준비하느라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지 못했고 급하게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 제5차 이손초 전투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총참모장은 1915년에 시도한 공세와 동일하게 톨민Tolmin과 고리치아Gorizia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야포와 병력을 준비하고 3월달에 시작할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급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동부전선, 발칸전선, 이탈리아 전선 세 전선을 담당해야 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상대해야 했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총참모장은 숫적 우위의 러시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보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야포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이탈리아 왕국은 이때를 기회라 보고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1916년 3월 9일 이탈리아 제2군과 제3군은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톨민Tolmin과 고리치아Gorizia를 점령하는 것으로 이탈리아군은 크라스Carso 고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전투를 재개했고 사바티노Sabatino 산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이 성과를 끝으로 더이상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에 막혀 3월 15일 공세를 중단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공세가 곧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손초Isonzo에서 일부 병력을 후퇴시키는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계책
이탈리아군은 턱없이 부족한 야포 수와 낙후된 전술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피해만 누적해갔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탈리아군의 졸전에 안심했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총참모장은 이손초Isonzo 방면으로 공세하는 이탈리아군의 병력을 분산하기 위해 베네토Veneto 북부를 공격하는 방안을 추진하다 역으로 알프스Alpen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 동부인 베네토Veneto를 공격해 점령함으로서 베네토Veneto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Friuli-Venezia Giulia를 포위 점령하는 것을 구상했습니다. 만일 이 베네토Veneto를 점령하는 공세가 성공한다면 이탈리아 왕국은 졸지에 이탈리아 동부의 영역을 상실할 것이고 이탈리아 왕국의 전쟁의지는 급격히 감소할 수 있었습니다.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총참모장은 해당 공세를 트렌티노Trentino 공세라 칭하고 독일제국의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군 총참모장에게 야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됭Verdun 전쟁에 사활을 건 독일제국은 이를 거절했고 트렌티노Trentino 공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단독으로 행해졌습니다.
- 트렌티노Trentino 공세
1916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트렌티노Trentino 일대에서 야포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공세에 당황했고 알프스Alpi 산맥 지대를 돌파당해 베네티안Venetian 고원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자연 방벽인 알프스Alpi 산맥을 돌파해 고원으로 내려왔다는 것으로 이탈리아군에게 적의 공세를 저지할 방해물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무능한 이탈리아 왕국 군부는 이 사실을 크게 우려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남부로 쾌속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보급로는 험난하고 구불구불한 알프스Alpen 산맥의 길을 통과해야 했고 산맥을 통과한 이후에도 드넓은 고원을 지나야 했습니다. 알프스Alpen 산맥은 철도, 트럭 등 다른 교통 수단으로 보급이 불가능했고 오직 인력과 가축의 힘으로 보급을 운송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보급 속도는 느려지고 보급량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계속 진격했고 1916년 5월 20일 아시아고Asiago 고원에 도착했습니다. 허나 아시아고Asiago 고원 앞에도 능선들이 존재했고 이탈리아군은 능선에 참호를 구축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기다렸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알프스Alpen 산맥 등산 이후 평원과 능선을 넘는 강행군에 지쳐있었고 이탈리아군이 참호선을 구축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그 앞에 참호선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은 숲 속 참호선에서 참호전을 펼쳤고 물량이 부족하고 육체적으로 지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수비자세를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참호로 돌격하며 공격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조금씩 후퇴했습니다.
그 사이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탈리아 전선의 트렌티노Trentino 공세에 집중하기 위해 동부전선의 병력 일부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낸 사실을 알아내고 6월 4일 브루실로프 공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Galizien을 공격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대공세에 놀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급파했습니다. 이에 따라 트렌티노Trentino 공세에 참가한 병사들도 본토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6월 10일 전면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 제6차 이손초 전투
러시아군의 브루실로프 공세에 밀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갈리치아Galizien을 다시 상실할 위기에 빠졌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총참모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주력병력을 동부전선으로 급파했습니다.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에는 병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총참모장은 이손초Isonzo 방면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력이 약화된 것을 확인하고 또다시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제6차 이손초 전투의 목표는 고리치아Gorizia 점령으로 1916년 8월 6일 이탈리아군은 이손초Isonzo 강을 넘어 크라스Carso 고원을 공격했습니다. 허나 이번에는 이탈리아군이 전범위 포격이 아닌 특정 지역을 집중 포격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방어선을 포격해 파괴한 뒤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기관총 응사로 저항했지만 이탈리아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시 투입해 물량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호를 점령했고 참호선 후방의 도베르도Doberdò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군이 이손초 전투에서 처음으로 집중 공세에 성공한 전투로 도베르도Doberdò 전투로 불렸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방어선이 돌파당하자 병력을 후퇴시켜 8월 8일 고리치아Gorizia 인근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한동안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했지만 이탈리아군은 여러 번 공세를 시도했고 결국 물량에 밀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리치아Gorizia에서 후퇴하면서 이탈리아군은 고리치아Gorizia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허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고리치아Gorizia 북동부 일부 지역을 아직 점령하고 있었고 고리치아Gorizia 북동부에서 참호선을 연결해 새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고리치아Gorizia를 완전히 수복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야포 공격에 피해를 입고 8월 16일 공세를 중단했습니다. 이로서 고리치아Gorizia 점령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습니다.
- 제7차 이손초 전투
루이지 카도르나 이탈리아군 총참모장은 이손초Isonzo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력을 약화하기 위해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9월 14일 제6차 이손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구축한 참호선을 포격한 뒤 보병을 투입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끝내 참호선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소모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루이지 카도르나는 이에 만족하며 9월 17일 공세를 중단했습니다.
- 제8차 이손초 전투
제7차 이손초 전투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규모를 축고시켰다고 생각한 루이지 카도르나 총참모장은 고리치아Gorizia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점령한 고리치아Gorizia 북동부를 공격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10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호선을 공격했고 초반 공세때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10월 12일 공세를 중단하고 병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 제9차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군은 제8차 이손초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방에서 병력을 보충하느라 한동안 공세를 하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부전선에 집중하느라 이탈리아 전선에는 소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지원을 소홀히 해 병력과 물자 보급 면에서 열약한 환경에 놓여있었고 때문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총참모장은 독일제국에게 독일군 지원을 끊임었이 요구했습니다. 허나 독일제국 역시 베르됭Verdun 공세가 실패할 조짐을 보이고 동부전선에 집중하느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병력을 파병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이탈리아군은 압도적인 보병과 야포로 무장했고 10월 31일 크라스Carso 고원 북부와 베르토이바Vertojba를 공격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고원지대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을 점령해 자연 엄폐물에 숨으며 이탈리아군의 진군을 방해했고 소규모로 파병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도우며 다중으로 참호선을 구축해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막아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11월 4일 공세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 하얀 금요일Lawinenkatastrophe vom 13.
제9차 이손초 전투 직후 11월 13일 금요일 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배치된 마르몰라타Marmolada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270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눈에 매몰되고 다른 지역에서도 눈사태로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수백명이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눈사태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사고로 기록되었고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눈사태로 희생된 전우를 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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