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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 전선: 카이저 카를 1세] 비운의 카이저

by 롱카이. 2022. 3. 9.
  •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카를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루돌프 황태자
루돌프 황태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1세는 1914년 대전쟁이 터질 때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카이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전제군주제의 카이저였고 그가 부재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마비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때문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의 후계자를 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정은 비극적이었고 그의 후계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아버지와의 심각한 갈등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신분이 낮은 여성과 귀천결혼을 해 그의 자식에게는 제위 계승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며 사망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카이저 카를 1세
카를 1세

결국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조카인 카를 1세를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카를 1세는 평화를 사랑한 인물로 대전쟁 전부터 유럽 각국과 평화협상을 체결하러 노력했습니다. 그는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영토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독일제국과 갈등을 벌였고 이탈리아 왕국과 영토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이탈리아 왕국은 미수복지를 모두 탈환해야 한다면서 그의 평화 협상을 거부했습니다. 이상주의자였던 카를 1세의 노력은 전쟁을 원하는 시대 흐름에 정반하는 것으로 그는 유럽의 평화를 위해 부던히 노력했지만 대전쟁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 거대한 세계 속의 작은 카이저

대오스트리아-합중국 언어별 지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부인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근면성실한 국정운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신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절대군주인 카이저 휘하에 제국이 움직였고 그의 존재 자체가 제국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916년 11월 21일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 카를 1세가 카이저에 등극했습니다. 그는 재위 전부터 국정에 참여하며 정치 경험을 쌓았고 평화를 사랑한 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뜻을 이어받아 오스트리아 연방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전쟁 동안 제국의 피지배민족 출신 병사들은 전쟁에서 많은 인원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피지배민족은 지배민족을 증오하며 민족국가 독립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슬라브인 등의 피지배민족은 제국의 절대자인 카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한 이후 민족 정부를 설립하고 독립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피지배민족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오스트리아 연방에 만족하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평화를 사랑한 그는 제국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연합국과 협상해 대전쟁 자체를 멈추고 제국의 신민들을 전쟁의 수렁에서 구출하러고 노력했습니다. 카를 1세는 연합국과 평화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그라프 체닌 외무장관을 제외한 관료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연합국과 평화협상을 추진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 평화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 먼 친척인 벨기에 왕국의 식스투스 왕자를 통해 프랑스 제3공화국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은 평화협상의 조건으로 이탈리아 왕국에게 미수복지를 할양할 것을 요구했고 카를 1세는 협상을 취소했습니다. 유약한 성격의 그는 전쟁의 광기에 미친 시대의 흐름과 맞써 싸울 힘이 앖았습니다. 이 시도는 1918년 4월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외무장관이 폭로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고 독일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배신에 놀라 분노했습니다. 카를 1세는 그라프 체닌 외무장관을 해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독일제국은 그를 불신했고 전쟁의 지휘권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 추락한 카이저

제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민중 반전 시위
오스트리아 민중 시위대

많은 유럽인들이 유약한 카이저에게 실망했습니다. 수백년 동안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이저는 유럽에서 절대자와 같은 존재였고 강인한 카이저는 유럽인들이 신망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설사 카이저에 대립하는 세력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카이저의 권위를 존중해왔습니다. 하지만 카를 1세는 다른 카이저와 달리 유약한 카이저였고 유럽의 민중들은 타이주가 적성국과 전쟁이 한창일 때 평화 협상을 추진하다 취소한다는 것은 비겁한 행위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민중은 더이상 카이저를 존중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민은 카이저를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관료들은 카이저에게 반기를 들었고 백성들은 카이저를 불신했습니다. 지배민족인 게르만족과 머저르족은 카이저에 대한 충성을 버렸고 카이저 없는 공화정을 주장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범위
분열 직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한 미합중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918년 1월 8일 발표한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라 유럽을 민족국가들로 재편성할 것을 약속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피지배민족들은 더욱 고무되어 민족독립운동을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남슬라브인들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독립을 추진했고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남서부에서는 이탈리아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트란실바니아Transsilvania에서는 루마니아 민족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갈리치아Galizen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 정부 건립을 준비했습니다. 제국의 그 누구도 카이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각자의 길을 가면서 카이저는 권위가 추락하고 제국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비운의 카이저 카를 1세는 무력하게 제국의 망조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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